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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journalism/지역신문

#5. 관성과 지역신문

매체 환경이 변하고 소비자가 변했습니다. 당연히 생산자가 그 변화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나 신문은 체질적으로 보수적인 매체입니다. 가장 일방적인 매체이기도 합니다. 100년 전 신문이나 오늘 신문이나 기본 구조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변해야 한다면 그 시도를 가로막는 벽이 뭘까 생각했습니다.

 

먼저 특정 부서가 특정 지면을 책임지는 구조를 지목합니다. <경남도민일보>는 주 5일 20면을 제작합니다. 편집국장을 비롯해 △자치행정부 △시민사회부 △문화체육부 △경제부 △논설여론부가 각자 맡은 지면이 있어 기사를 출고합니다. 이 기사를 모아 편집부가 지면을 제작합니다. 규모나 부서 이름이 다를지언정 대부분 신문 제작 구조는 이 방식을 따릅니다.

 

이런 구조가 만들어진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매일 우발적인 환경에서 일정한 결과물을 내야 하는 신문은 자연스럽게 '안정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면을 채워야 할 기사가 세 꼭지인데 오늘 들어온 기사가 두 꼭지라고 한 꼭지를 비워서 인쇄할 수도 없고, 네 꼭지가 있다고 모두 넣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입니다. 몸이 침대보다 길면 자르고 짧으면 늘리는 것 말입니다. 지면을 나눠 부서에 할당하는 방식은 생산하는 처지에서 가장 안정적입니다.

 

 

"출고, 편집, 출고, 편집." @영화 <모던 타임스>

 

문제는 신문 생산 구조가 어떻든 소비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문은 매일 지면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평균적으로 일정한 역량을 배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소비자는 신문을 그 수고와 비례해 소비하지 않습니다. 생산자조차 무의식적으로 '때운다', '메운다'는 표현을 쓰는 결과물에 어떤 소비자가 매력을 느끼겠습니까.

 

그렇더라도 신문은 이 구조를 포기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가장 익숙하고 안정적인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신문이 생기고 지금까지 이 구조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검증된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변화는 견고한 구조에 균열을 내면서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그 흔한 '가장 익숙한 것과 결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펼치면 상단에 지면 이름이 있습니다. 신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같은 것입니다. 뉴스를 체계적으로 나눈 듯한 이 분류는 해당 부서가 이 지면을 무조건 채우라는 지시이기도 합니다. 단지 맡은 지면을 채우고자 생산자조차 설레지 않는 콘텐츠를 끼워 넣어야 한다면? 콘텐츠 가치를 축소하거나 과장한다면? 그 결과물은 뻔합니다. 생산자가 설레지 않는 콘텐츠를 어떻게 소비자에게 권합니까?

 

신문, 특히 종합 일간지마다 변별력이 없는 이유도 획일적인 생산 구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비자에게는 아무 의미 없고 생산자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이 구조부터 깨야 내용이 변할 수 있습니다. 이 구조를 어떻게든 건드리지 않으면 신문을 향한 선의 가득한 충고는 별 의미 없습니다. 그나마 달리는 방향을 잽싸게 틀어야 한다면 공룡보다 생쥐가 낫지 않겠습니까. 거대 매체보다 지역신문이 나은 점입니다. 그 장점을 끝내 활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직은 낙관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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