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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to ye-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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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섯 살 # 놀이동산 단둘이 외출은 처음이었다. 조심스레 선택한 경로는 집과 가까운 놀이동산, 놀이동산과 가까운 미술관이었다. 아빠 앞에서 늘 수줍던 너는 마음껏 웃고 놀라며 뛰어다녔다. 네 표정을 남보다 많이 알지 못해 부끄러웠다. 엄마는 느닷없는 부녀 외출을 치켜세웠다. 고단한 육아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나 보다. 너에게 나태했던 일상을 잊고 잠시 으쓱했다. 그날 저녁 너는 끊임없이 기침하며 골골거렸다. 꺅꺅거리며 트램펄린에서 한참을 뛰어올랐던 모습이 떠올랐다. 말리기는커녕 마냥 흐뭇하게 지켜봤던 것을 후회했다. 퀭한 눈을 마주하니 도망치고 싶더라. 좋은 아빠 노릇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미안했다. # 해결사 3년 만기 대출금을 털었다. 체감 월급을 30만 원이나 인상한 셈이란다. 능력 있..
2013년 일곱 살 # 질문 새해 들어 부쩍 질문이 늘었구나. '왜'로 시작해서 '왜'로 다시 이어지는 끝없는 질문 말이다. 대답하는 아빠야 물론 피곤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살면서 '왜' 만큼 본질적인 질문이 얼마나 있을까. 차마 대놓고 누구에게 묻지 못하는 것을 너는 당당하고 거침없이 묻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부러웠다. 당연히 아이가 누릴 특권이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으나 오랫동안 그랬으면 좋겠다. # 역차별 차에서 내리며 네 가방과 엄마 가방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랗고 묵직한 봉투, 아빠 가방 두 개까지 모두 양손에 들었다. 노는 손가락 하나 없더구나. 네 손에는 달랑 인형 한 개뿐이었다. 엄마는 그냥 긴 종이상자, 그것도 속이 비어 있는 상자 하나를 들었을 뿐이었다. 너는 계속 엄마에게 도와주겠다, 같..
2014년 여덟 살 # 새해 프로젝트 2013년 마지막 날 조촐한 파티에서 네 새해 소망을 들었다. "나도 잘할 테니까 혹시 내가 잘못해도 엄마·아빠가 화내지 않는 '친절한 가족'이 됐으면 좋겠어." 갑자기 무슨 서러운 기억이 떠올랐는지 펑펑 울었다. 엄마·아빠 마음 아는데 그렇게 얘기해서 또 미안하다니 무슨 아이답지 않은 배려인가 했다. 괜히 숙연해졌단다. 올해 우리 가족 프로젝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친절한 가족'이다. 올해도 잘 해보자. # 질투 새해를 맞아 네가 손수 만든 연하장을 공개했다. to mom and dad Happy new year! 이렇게 달랑 두 줄인데 마음이 한없이 풍요로워졌다. 그나저나 엄마·아빠 부르는 순서를 정한 근거나 기준이 궁금했다. "왜 맘 앤 대드야, 대드 앤 맘이면 안 돼?" "왜..
2015년 아홉 살 # 보라색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섹시하다는 얘기는 어디서 들었을까? 아빠 안경테에 은은하게 깔린 보라색을 보면 알겠지만, 아빠가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너는 꺽꺽 넘어가며 웃었다. "아빠, 안 섹시해!" 너는 그렇다 치고 네 엄마는 왜 같이 웃을까? # 면박 친구 집에 놀러 갔다더구나. 친구 엄마에게 딸을 잘 부탁한다고 전화하는 게 엄마가 생각하는 예의다. "집이 엉망이라 예지가 놀랄지도 몰라요." "우리 집도 항상 그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데 너는 친구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친구 아빠에게 아주 큰 면박을 줬더구나. "아저씨, 집이 왜 이래요? 이거 참." 일단 지난 주말에 청소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고자질과 신고 "고자질이 나쁜 거야?" 네 ..
2016년 열 살 # 라면 냉장고 채소를 모두 동원했다. 살릴 것은 살리고 버릴 것은 버렸다. 끓는 물에 아낌없이 무를 넣었다. 한참 끓이다 양파와 애호박도 넣었다. 깊은 맛이 눈에 보이고 코를 찌르더구나. 낮잠을 자다가 깬 네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국물을 살짝 맛보더니 환한 표정에 콧소리까지 섞어 한마디 하더구나. "아빠, 국물이 진짜 깊고 맛있어요." '엄지 척'은 보너스니? 네 감상이 깊고 맛깔나구나. 아빠가 만든 라면이 다 그렇단다. # 감기 열이 갑자기 38도를 넘어 깜짝 놀랐다. 어쩐지 상태가 좀 그렇다 싶더니. 병원에 가는데 영 힘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든 힘을 좀 주고 싶었다. "예지, 아프니까 공부나 방학숙제는 못 하겠네. 혹시 할 수 있겠어?" "아빠, 전에 항상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2017년 열한 살 # 배웅 새해 첫날부터 당직까지 걸려 일찍 나가게 됐다. 급하게 나가는데 화장실에서 네가 나오더구나. "회사 가?" "응, 일찍 일어났네." "잘 다녀와. 사랑해." "아빠도 사랑해." 공중으로 날려 보내는 네 키스를 미쳤다고 피하겠니. 이렇게 부녀가 달달한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엄마는 주무시는 중이었다. 아내 빈자리를 딸이 채운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저녁에 보자. # 인라인 스케이트 방학 동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자전거로 바꿔주지도 않았고 아이스링크에 가서 스케이트를 타지도 않았지. 그렇다고 가족이 여행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대놓고 투정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소멸되는 방학을 아쉬워하는 모습이 딱했다. "예지, 인라인 스케이트 살까? 자연스럽게 ..
2018년 열두 살 # 12살 아빠 어릴 적 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었다. 어른 보기에 그냥 꼬맹이지만 스스로 알 것 다 안다 생각하는 주인공을 다룬 성장기였다. 제목 때문인지 12살은 어쩐지 다른 의미로 다가오네. 2018년을 맞아 12살 딸을 보는 감상을 추억과 버무려 엄마에게 얘기했더니 이렇게 분위기를 깨더구나. "미국 나이로 12살이면 우리 나이로 13살 아닌가?" 따지고 보면 말은 맞지. 아빠 추억과 딸이 한 살 더 먹은 의미를 한 번에 날릴 정도로 대단한 사실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늘 그렇듯 올해도 응원한다. # 검도 운동 부족을 걱정해 시작한 검도가 나름 재밌나 보구나. 칼 없이 기본동작을 하며 '머리'를 외치는 모습이 멋졌다. '조선제일검'은 됐고, 살면서 한 번쯤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재주 정도는 됐으..
2019년 열세 살 # 나무 사다리 차를 고정시키는 다리 밑에 두꺼운 나무 블록을 까는 게 신기했니? "아빠, 왜 나무를 깔까. 쇠가 더 단단할 텐데." "나무는 단단한 것 중에 가장 부드럽고 부드러운 것 중에 가장 단단하거든." 알듯 말듯하면서 아는 척 끄덕이는 게 엄마 닮았구나. 아빠 답이 꽤 우아하지? # 반지 엄마가 주섬주섬 폐물을 챙겼다. 귀금속 몇 개를 맡겨 새 목걸이를 만들겠다는구나. 하나는 중학생이 되는 네 사촌언니, 나머지 하나는 너를 주겠다네. 결혼 전 끼었던 커플링이 있어 오랜만에 손가락을 넣었더니 감회가 새롭더라. 금은방에서 이런저런 귀금속 조합으로 가격을 맞추더구나. 팔찌, 반지, 귀걸이 등을 감정받으며 새로 만들 목걸이 가격에 다가갔지. 제법 차액이 난다 싶더니 엄마 눈 속 포인터가 아빠 손가락을 ..
2020년 열네 살 # 약한 쪽과 맞는 쪽 다른 고구마를 두고 굳이 엄마가 자기 먹기 좋게 자른 고구마를 아빠가 냉큼 집어 먹으면서 시작한 커뮤니티 댓글 같은 공방은 점점 유치하게 진행됐다. 보다 못한 네가 엄마를 거들더구나. "예지, 딱 봐도 아빠가 지금 엄마보다 약한 게 보이지 않아?" "보여." "그러면 약한 사람을 도와야지 왜 센 사람을 도와? 섭섭해." 한참 어이없이 웃던 네가 곧 표정을 수습하며 이렇게 매듭짓더구나. "왜 약한 쪽을 도와? 맞는 쪽을 도와야지." # 엄마 분석 "사실 자기도 자기 마음을 잘 모르는데 옆에서 마음에 드는 뭔가를 말해주길 기다렸다가 그게 아닌 다른 말을 하면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엄마는 왜 말을 애매하게 해놓고 못 알아들으면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고 하는지 모르겠..
2021년 열다섯 살 # 러브하우스 2021년 새해를 청소로 시작한다. 치우고 정리할 보금자리가 있다는 게 새삼 좋다. 집주인이 따로 있다는 하찮은 사실 따위는 잠시 잊자. 엄마는 꽤 오래전부터 네 방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싶어 하더구나. 작은 공간에 피아노와 가구를 구겨 넣었으니 보기에 늘 갑갑했나 보다. 민원을 받고 틈나는 대로 머릿속에서 배치를 반복했다. 옮기는 게 피아노, 침대, 옷장, 화장대이니 작은방인데도 드는 일품이 만만찮았다. 그래도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엄마와 입을 다물 줄 모르는 너를 보니 뿌듯하구나. 게다가 '러브하우스' 리액션(아빠가 옆에서 '따라 따라따~' 음악을 흥얼거리면 손으로 눈을 가리고 방에 들어왔다가 손을 내리면서 아주 깜짝 놀라는 척하며 환호하는 연기)을 아주 완벽하게 재연해 더 좋았다..
2022년 열여섯 살 # 북유럽 감수성 오늘부터 방학이라니 부럽구나. "네 방학 만 원에 하루씩 사면 안 될까?" "싫어." "왜? 만 원이 적어?" "그게 아니라 무슨 휴식을 돈으로 계산하려고 해?" 괜히 북유럽 감수성 같아서 마음에 들었단다. # 코로나19 열이 38도를 넘어 39도를 넘보기에 깜짝 놀랐다. 드디어 올 게 왔나 싶더라. 그런 시절이지 않니. 가까운 호흡기 클리닉 병원을 가면서도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거기 서세요." 2미터 정도 거리에서 의사 선생님이 지시했다. 낯선 원거리(?) 진료가 괜히 걱정을 더 키우더구나. 몇 가지 절차를 거쳐 신속 검사를 진행했다. 2분 먼저 음성 결과를 받은 네 표정이 평화롭더라. 열 없는 아빠 역시 음성으로 나왔다. 결과를 확인하자 의사 선생님도 가까이 오라더구나.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