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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to ye-ji

2012년 여섯 살

# 놀이동산

단둘이 외출은 처음이었다.

 

조심스레 선택한 경로는 집과 가까운 놀이동산, 놀이동산과 가까운 미술관이었다. 아빠 앞에서 늘 수줍던 너는 마음껏 웃고 놀라며 뛰어다녔다. 네 표정을 남보다 많이 알지 못해 부끄러웠다.

엄마는 느닷없는 부녀 외출을 치켜세웠다. 고단한 육아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나 보다. 너에게 나태했던 일상을 잊고 잠시 으쓱했다.

그날 저녁 너는 끊임없이 기침하며 골골거렸다. 꺅꺅거리며 트램펄린에서 한참을 뛰어올랐던 모습이 떠올랐다. 말리기는커녕 마냥 흐뭇하게 지켜봤던 것을 후회했다. 퀭한 눈을 마주하니 도망치고 싶더라. 좋은 아빠 노릇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미안했다.



# 해결사

3년 만기 대출금을 털었다. 체감 월급을 30만 원이나 인상한 셈이란다. 능력 있는 아빠는 가만히 앉아서 회사가 급여를 올려 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어쨌든 달마다 생길 30만 원 용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자? 기부? 저축? 옆에서 엄마가 야무지게 말했다.

 “예지 올해 유치원 가거든.”

잊지 말자. 엄마는 언제나 해결사란다.



# 발표회

유아 시절을 마감하는 '재롱발표회'를 조마조마하면서 봤다. 무대마다 참여하는 모습이 무척 대견했다. 그나저나 고만고만한 애들 가운데 섞여 끼어앉은 자그마한 너를 찾을 수 있을까 걱정 했는데… 아빠도 엄마도 어쩔 수 없이 너만 덩그러니 보이더라. 



# 반창고

종이에 손가락을 베인 아빠에게 성큼 다가오는 너를 보고 오히려 놀랐다. 피가 무섭지 않니?
 
“어쩌다 그랬어? 조심하지. 나도 어릴 적에…”

엄마가 너를 어르고 달래는 말투 그대로다. '어릴 적'이라는 말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달래고 물었다.

“예지가 어릴 적이면 언제야?”
“네 살.”

대답도, 반창고 붙이는 솜씨도 참 야무지다.



# 변신

엄마 따라 미용실을 간 아기가 소녀가 돼서 왔구나. 깜짝 놀랐다. 아빠가 감각이 좀 무디고 둔한데다 그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무척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여자에게 변신은 무죄'라는 명제마저 모르지는 않는다.



# 육아

언젠가 고작 여섯 살짜리 아이 행동을 참지 못해 화를 낸 적이 있다.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며 벌벌 떠는 모습에 오히려 당황했다. 엄마는 ‘감정 조절 실패’라며 아빠를 원망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야단을 치는 목적이 네가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이었나? 그저 화를 참지 못한 핑계가 필요했나? 기껏 내 눈에 잘못을 고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한 것인가?

며칠 뒤 엄마는 아이에게 말하는 법을 안내한 책을 한 권 구해줬다. 거듭 읽으면서 공감한 요령이 일상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항상 고민했다. 그래서 아빠로서 잘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늘 애쓴단다.


 
# 수컷

유치원에서 같은 반 남자 아이에게 사탕을 받아왔구나. 그 친구가 너에게 내일 자기 먹을 것도 하나 달라 했다고? 낯선 아이에게서 수컷 향기를 느꼈다. 다음 날 아침 친구 사탕을 챙기는 엄마 모습이 더 웃겼다. 너는 그렇게 조금씩 자라고 또 자라는구나.



# 모르지 않아

바닥에 널부러진 물건 대부분이 네 것이었다. 너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 장난감을 질질 끌고 나오더라. 화가 나더라도 다정하게 말하라는 게 엄마 지침이며 새로 형성 중인 가풍(家風)이다.

“집이 엉망인데 어떻게 해야 집이 깨끗해질 수 있을까?”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새 장난감을 꺼내고 싶으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정리해서 깨끗하게 치우고 새 장난감을 꺼내면 돼.”

너무 반듯한 답에 오히려 당황했다. 대답과 달리 새 장난감을 계속 늘어놓는 모습이 아주 뻔뻔했지만 전혀 밉지 않았다.



# 2012년 총선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너에게는 일상이 되기를 바란다. 네 미래를 응원한다.



# 감정 표현

너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아이다. 아기 때부터 좋으면서도 웃음을 참는 너를 보면서 아주 다루기 힘든 아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네가 아이패드로 '앵그리 버드(Angry Birds)'를 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하더구나. 새 한 마리로 돼지를 한 번에 쓸어버리는 성과가 그렇게 흥분됐나 싶더라. 엄마에게 그 얘기를 전하며 한참 함께 웃다가 느닷없이 짠해졌다. 

아가, 어떤 감정이든 늘 그렇게 마음껏 표현하면서 살기를 응원한다.



# 거울

너를 안고 엘리베이터를 타니 거울이 보이더구나. 순간 상상력이 발동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아빠가 거울에게 묻는 것은 상상력이지만 거울이 아빠에게 답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별 관심 없어 보이던 네가 나지막이 물었다.

“뭐래?”
“이예지라는데.”

살짝 미소짓던 너는 이내 냉정을 찾더니 거울에게 한마디 쏘더구나.

“안 들려, 크게 말하라고!”



# 택배

갑자기 앞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늘 그렇듯 호기심이 발동했나 보구나. 무슨 소리냐고 묻는 말에 당장 할 말이 없었다.

“글쎄, 손님이 왔나?”
“손님? 택배?”

어쩌다가 손님이 곧 택배가 됐는지는 엄마가 잘 알겠지. 며칠 전 홈쇼핑 채널에 집중하며 눈을 떼지 못하던 엄마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 후유증

유치원 운동회, 바로 이어진 어린이날 주요 행사 등 대선 후보급 일정을 소화한 너는 구토와 고열에 시달리며 응급실로 향했다. 밤새 너에게 시달리던 엄마도 마침내 침대에서 뻗더구나. 열이 내리지 않은 너는 그래도 거실에서 늘어져 <뽀로로>를 시청하는 집념을 보여줬다. 아빠는 너와 엄마를 병원으로 모시고 다시 출근하는 비서관 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했다. 아플 때마다 느끼겠지만 건강이 최고다.



# 편애

식당에서 엄마는 너와 함께 먹겠다며 된장찌개를 시켰다. 아빠는 비빔냉면과 함께 먹을 만두 한 접시를 시켰다. 엄마는 끈적한 눈길을 한참 냉면에 보내더니 결국 한 젓가락 가져가더구나. 그래도 아쉬워 보여 아빠는 한 젓가락을 더 권했다. 접시를 내밀며 흐뭇해하는 엄마 표정 봤니?

“아빠는 엄마만 사랑해?”

아빠 입으로 들어가던 냉면을 가까스로 어색하지 않게 네 밥그릇에 덜었다. 순발력은 이럴 때 발휘해야 마땅하다. 이 자리에서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엄마와 너는 뭐든 하나 시켜서 나눠먹을 시기가 지났다는 것, 네가 사랑은 물질로 증명한다는 진리를 이미 깨우쳤다는 것.



# 무남독녀

흰색 구두, 분홍색 구두, 빨간색 털신, 분홍색 구두, 연분홍색 구두, 흰색 구두, 흰색 바탕에 분홍색 줄무늬 구두, 분홍색 장화, 흰색 구두…. 

누가 봐도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가정이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챌 수 있는 현관이다. 단지 우리집에 딸이 하나뿐이라는 사실만 이상할 뿐이란다.



# 원작

한동안 네가 읽어달라던 책은 십중팔구 <백설공주>였다. 왕비가 거울에게 묻는 대목은 아빠 어릴 적까지 더해 3000번 넘게 접했을 듯하다. 느닷없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그냥 읽는 지겨움에서 벗어나려는 발악이었다.
 
“거울이 뭐라고 대답했을까? 아빠 생각에는 '이예지'라고 했을 것 같은데.”
“아빠, 주인공이 백설공주니까 '백설공주'라고 해야 맞는 거야.”

백 번 옳은 말이지만 면박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슬쩍 띄우면 그냥 웃고 넘길 줄 알았거든. 그나저나 자신 있는 내용을 얘기할 때 목소리 까는 것은 어디서 배웠니?



# 명배우

외할머니 집에서 자는 너를 껴안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너를 껴안고, 우산 들고, 아빠 가방과 네 가방도 들었다. 어디 남는 손이 없더구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너에게 괜찮냐고 물었던 것은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웬만하면 걸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엘리베이터 거울에서 아빠 어깨너머 말똥말똥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다시 물었다.

“예지야, 걸을까?”

대답은커녕 아무 반응이 없더구나. 다시 거울을 보니 너는 미간에 약간 주름이 생길 정도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결국, 침대까지 안고 가서 눕힐 수밖에 없더구나. 잘 자거라.



# 명배우 2

엄마가 밥 먹자는데 아이패드 하겠다는 네가 살짝 괘씸했다. 아이패드도 중요하지만 밥 먹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빠 몫이란다. 순순히 자리에 앉은 너는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빈 그릇을 내밀더구나. 혀 짧은 소리로 다 먹었다면서 말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칭찬이다. '흠칫 놀라며' 같은 지문을 소화하는 것 또한 오롯이 아빠 몫이다.

“(흠칫 놀라며) 진짜 대단하네. 7살 언니 같네.”

그냥 언니라고 하면 체감하기 어렵고, 8살이라고 하면 너무 멀어 한 살만 올리는 디테일 봤니? 아빠 배역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 소외

네가 엄마에게 푹 안길 때만 해도 사랑놀음이 그렇게 길게 이어질 줄 몰랐다.

“엄마 사랑해.”
“엄마도 예지 너무 사랑해.”

이렇게 시작한 대화는 내용과 깊이도 없이 '너무' 숫자만 늘리며 이어지더라. 나중에는 ‘너무, 너무너무, 너무너무너무, 너무무무무무무’까지 나왔다. 이 행복한 장면에 끼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큰 욕심은 아니잖아?

“아빠도 예지 사랑해.”
“나도 알아.”
“예지를 너무 사랑한다고.”
“나도 안다고.”

아빠 욕심이 컸니?
 


# 체크

너에게 아빠가 5순위 정도 될까?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다음에 아빠. 언젠가부터 아침에 아빠가 안 보이면 체크하기 시작했다는 희소식을 들었다.

“엄마, 아빠는 개구쟁이지만 엄마 옆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

개구쟁이? 그래, 장난꾸러기도 좋고 심술쟁이도 좋다. 네 옆은 아니었지만 엄마 옆이라도 계속 있으면 좋겠다는 말에 그저 흐뭇했다.



# 홍보

거실에서 뒹굴거리던 네가 갑자기 널브러진 인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깔끔해진 거실을 보면서 칭찬을 아낄 수 없더구나. 너도 상당히 뿌듯해하더라. 그래도 뭐가 아쉬운지 주변에서 계속 서성이는 이유를 한 번에 알아채기는 어려웠다.

“아빠, 내가 정리한 거 사진 찍어서 엄마한테 문자로 보내줘도 괜찮은데.”

홍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기는커녕 오른쪽 새끼발가락까지 알게 하는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 언감생심

아빠를 우주만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순간 없던 자신감마저 우주만큼 치솟더구나.

“우주만큼? 그러면 엄마는?”
“엄마요? 엄마는 우주보다 더 사랑해요.”

미처 ‘더(more)’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 만큼이 바로 아빠와 엄마 차이구나. 이인자가 일인자를 함부로 넘보면 안 되는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 인류애

네가 신나서 흥얼거리는 말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저 ‘김수한무’로 시작하는 옛 우스갯소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다만 계속 섞여 나오는 ‘아프리카 새깜둥이’라는 표현은 거슬리더라. 괜히 검은 피부를 놀리는 것처럼 들렸거든. 

피부색은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것으로 놀림 대상이 되는 것은 부당하다. 여성이라고, 키가 작다고, 피부 색이 어떻다고 누가 감히 너를  놀릴 수 있겠느냐 말이다! 불편한 점을 얘기했더니 네가 선뜻 동의해서 아주 흐뭇했다.



# 첫 통화

태풍이 몰아치던 날 아빠는 출장 중이었다. 집이 걱정돼 전화했더니 네가 먼저 받아 조금 놀랐다. 엄마가 바꿔 준 적은 있어도 네가 바로 전화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예지가 전화받았어?”
“응.”
“엄마는?”
“화장실 갔어.”
“안 무서워?”
“응.”
“용감하네, 창문 안 흔들려?”
“조금 흔들려.”
“안 무서워?”
“응.”
“바람 많이 안 불어?”
“바람 조금 불어.”
“안 무서워?”
“응. 아빠, 그런데 왜 물어본 거 자꾸 물어봐?”

그러게 말이다. 왜 자꾸 같은 질문을 했을까.



# 확인

네가 요즘 유난히 사랑을 측정하고 비교하고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오늘도 엄마에게 사랑하느냐고 묻고 묻고 또 묻는구나. 그 역시 자라는 과정일 테다. 지나치냐고? 그럴리가. 엄마에게 늘 확인받고 싶은 것은 아빠도 마찬가지다.



# 일과표

하루 일과표를 그린 그림을 봤다. 치카치카를 하고 책을 읽고 잠을 자는 등 순서대로 정리한 그림이 신기했다. 너도 바쁜 하루를 보내는구나. 그냥 6살 어린이처럼 내키는 대로 살면 되지 왜 시키지도 않은 일과를 정해 그림까지 그리는 지는 모르겠다만  뚝딱 그린 그림은 기발하면서 직관적이었다. 재능이 예사롭지 않더라.



# 위로

“엄마 나이는 알겠는데 아빠는 몇 살이야?”

느닷없이 나이를 까라는 질문에 놀랐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

“어? 엄마보다 적네. 그래도 아빠가 키도 크고 힘도 세잖아. 나이가 적다고 마음이 작은 것도 아니고.”

마음이 작은 게 아니라는 대목이 큰 위로가 됐다. 물론 그런 위로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만.



# 한계

점점 거창해지는 애정 표현에 놀라고 있다. 물론 표현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다만 ‘하늘만큼'으로 시작해 ‘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만큼', ‘우주보다 더' 이후에 뭐가 더 나올 수 있을까.

“아빠, 내가 엄마⋅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아?”
“글쎄.”
“아빠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물론 표현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 미련

쌓이기만 하는 장난감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너에게 상자를 주며 필요 없는 것과 부서진 장난감을 골라낼 결정권을 줬다. 한 시간 정도 신중하게 검토하던 너는 플라스틱 그릇 하나, 작은 탬버린, 용도를 알 수 없는 부서진 장난감 등 딱 세 개만 내놓았다. 대충 봐도 절반은 버려야겠던데….

이 장난감은 누구와 함께 갖고 놀았고, 이 장남감은 누가 사줬고, 이 장난감은 누구에게 얻었고 한없이 이어지는 설명을 들었다. 저마다 사연 없는 장난감이 없구나. 네 추억을 너무 사소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제대로 정리하자.



# 본심

TV 영화 채널을 한참 보는데 스윽 다가오는 네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아빠, 그게 재밌어?”
“응, 재밌어.”
“난 EBS랑 KBS키즈가 재밌어.”

잠시 멈칫했으나 곧 리모컨을 넘겼다. 그나저나 처음부터 EBS나 KBS키즈 보고 싶다고 말하면 안 되겠니? 말하는 맵시가 딱 엄마구나.



# 해결책

뉴질랜드로 출장 간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장난감 하나 보이지 않는다고 짜증내고 시비 걸어도 이해했다. 그래도 무작정 그런 투정을 방치할 수 없었기에 이유를 물었단다.

“짜증 나는 이유를 모르겠어.”

훌쩍거리는 너에게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먼저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아빠, 기분 좋았을 때를 떠올리면 금방 기분이 좋아져.”
“기분 좋았을 때? 어떤 때?”
“엄마⋅아빠한테 선물 받았을 때.”

뭔가 당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더구다.



# 2012년 대선

너는 원칙과 상식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당연히 딛고 버틸 땅이지 애써야만 따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다.



# 나쁜 남자

유치원에서 7살 오빠들이 괴롭혔다고? 우선 네 대응이 궁금했다.

“나도 7살 되니까 그러지 말라고 했어.”

잘했다. 그런데 같은 반에 힘센 남자 친구 한 명 있다고 하지 않았니? 그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면 어땠을까?

“안 돼. 걔는 너무 착해.”

여성 동지들이 나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 동심

출장 간 곳에 폭설이 내려 꼼짝없이 갇히게 됐다. 이 상황을 전해야 해서 전화했는데 엄마가 너에게 휴대전화를 넘기더구나.

“눈이 많이 오는데 어쩌지?”
“어쩌기는? 밖에 나가서 신나게 놀아야지.”

고민이라고는 조금도 끼어 있지 않은 대답이 신선하고 상쾌했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지만 거듭 생각해도 네가 백 번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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