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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to ye-ji

2015년 아홉 살

# 보라색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섹시하다는 얘기는 어디서 들었을까? 아빠 안경테에 은은하게 깔린 보라색을 보면 알겠지만, 아빠가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너는 꺽꺽 넘어가며 웃었다.

"아빠, 안 섹시해!"

너는 그렇다 치고 네 엄마는 왜 같이 웃을까?



# 면박

친구 집에 놀러 갔다더구나. 친구 엄마에게 딸을 잘 부탁한다고 전화하는 게 엄마가 생각하는 예의다.

"집이 엉망이라 예지가 놀랄지도 몰라요."
"우리 집도 항상 그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데 너는 친구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친구 아빠에게 아주 큰 면박을 줬더구나.

"아저씨, 집이 왜 이래요? 이거 참."

일단 지난 주말에 청소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고자질과 신고

"고자질이 나쁜 거야?"

네 생각을 되물은 것은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었다. 친구들이 고자질은 무조건 나쁘다고 하니 고민됐구나. 이럴 때 정리하라고 아빠가 존재한다.

"예지가 잘못한 걸 아빠가 나중에 엄마에게 고자질하는 건 어때?"
"나빠."
"도둑을 경찰에게 신고하면?"
"안 나빠."

그 차이가 뭐냐고 물었지만 그럴싸한 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문제 자체가 워낙 어려우니 말이다.

"아빠가 처리할 수 있으면 고자질할 필요 없잖아. 아빠 힘으로 안 되면 고자질 해야지. 그건 나쁜 게 아닌데."



# 묵찌빠

슈퍼에 누가 다녀오느냐를 놓고 네 엄마와 잠시 신경전을 벌였다. 팽팽하지 않던? 이런 상황에서는 역시 '가위·바위·보'란다. 좀 색다르게 마주 앉은 채로 종이에 각자 낼 묵찌빠 순서를 적기로 했지. 심판은 너에게 맡겼다.

"예지, 엄마 뭐라고 적었어?"
"빠, 묵, 찌."
"그러면 아빠는 뭐라고 적었지?"
"찌, 빠, 묵… 엥? 아빠, 엄마 거 보고 적은 거 아냐?"

아빠가 엄마 맘을 훨씬 잘 헤아린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런 의미로 슈퍼도 아빠가 다녀올 거고. 그나저나 3대 0이 뭐니 참.



# 빨래

엄마와 빨래를 널 때마다 너를 부르는 이유가 있다. 서로 도우면서 가족애를 느끼고 네 성장을 확인하며 이제 스스로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한 명으로서 제 역할을 해내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기 위한 의도 따위는 없다. 아빠 혼자 거들려니 힘들어서 부른다. 그나마 네가 이제 충분한 전력으로서 몫을 하기에 일이 훨씬 수월하다.

"아빠, 빨래 널 때마다 부르니까 이제 귀찮어."
"귀찮은 게 분명한데 늘 도와줘서 고마워."

지체없는 답에 알겠다며 바구니에서 빨래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한숨 돌렸다. 참한 일꾼 한 명 잃는가 해서 움찔했다.



# 나쁜 새끼

학교에서 어떤 남자애가 때렸다는 말에 놀랐다. 맞은 것처럼 아빠를 때려보라 했더니 뺨을 찰싹 치더구나. 아프지는 않았는데 충격받았다.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응징했다니 잘했다. 절대 호락호락 넘어가서는 안 된다. 야근하고 들어온 엄마에게 상황을 전했더니 조심스레 네 기분을 확인하고 조곤조곤 조언하더구나. 엄마는 늘 단어 선택이 신중하다. 하지만, 네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네 엄마는 갑자기 눈에 힘을 확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런 말 진짜 잘 안 하는데, 이놈 새끼가 누구를!"



# 외식

주말 점심때가 다가오자 혹시 외식할 거냐고 물었다. 좀처럼 먹는 것으로 욕구를 드러내지 않는 네가 먼저 말을 꺼내 반가우면서도 궁금했다.

"전에 엄마랑 갔던 고기 구워 먹는 집 있잖아. 식탁 가운데에 불 집어넣고 백김치 반찬 나오고 약간 양념 맛도 나는 고기 구웠고. 그런데, 만약 안 되면 다른 데 가도 괜찮아."

그렇게 섬세하게 묘사하는데 끝까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 가창력

구석에서 혼자 웅얼웅얼하길래 뭐하나 했다. 헤드셋을 쓰고 동영상을 보며 따라 하는 게 노래 같기는 했는데 잘 알아듣지는 못하겠더라. 남자 키와 여자 키를 변화무쌍하게 오가고 아낌없이 가성을 쓰는 것을 봐서 뭔가 상당히 고난도 노래라는 것을 짐작했다.

"다 돌려놔~"

그래, 그 노래였다. 행동과 말투가 늘 차분한 너에게 처음으로 어떤 불안함을 느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잘할 필요는 없다.



# 벼락치기

혼자 방구석에서 몇 시간 동안 나오지 않길래 봤더니 방학숙제를 몰아서 하더구나. 엄마도 아빠도 방학 내내 숙제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벼락치기하는 게 어떤 면에서는 대견했다. 그나저나 저렇게 한 번 성공하면 습관이 되지 않겠느냐는 걱정에 네 엄마가 답했다.

"방학 내내 숙제 준비한 애들과 비교하면 완전 차이가 많이 날 걸. 성격상 충격을 좀 받을 것이고 다음에는 벼락치기 못 할 거야."

한마디로 당해 봐야 안다는 계산이다. 아빠도 엄마 생각과 같다.



# 산수

네가 '한'과 '원'이라는 글자를 놓고 결국 같은 글자라고 했을 때 뭔 말인가 했다. '우'를 뒤집으면 'ㅎ'이 되고, 'ㅓ'를 뒤집으면 'ㅏ'가 되니 '원'이 '한'이 되는 거 아니냐고 했을 때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236 다음에 뭐야?"
"응, 237!"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잘 할 필요는 없다.



# 잠꼬대

TV를 보는데 일찌감치 자던 네가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TV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나 싶어 일단 껐다. 짧게 킥킥거리던 너는 뭔가 아쉬운 듯 애교도 부리더니 다시 무표정하게 곯아떨어졌다.

"아빠, 잠꼬대 해?"
"아빠? 자고 있으니까 내가 잠꼬대하는지는 모르지."
"그러면 나는 잠꼬대 해?"

그 질문에 갑자기 생각났다.



# 막대사탕

막대 사탕을 입에 물던 네가 '담배'라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 일단 엄마가 부엌에 있어서 다행이다. 낮은 목소리로 너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지, 아빠는 괜찮지만 엄마는 진짜 싫어하거든. 엄청 화낼 수도 있어.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
"그런가? 알았어."

물론 엄마가 네 담배 코스프레를 근거로 아빠를 몰아붙인다면 드라마 핑계를 댈 생각이었다. 설득력은 없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다.



# 측은지심

엄마와 시장에서 생선을 손질하는 모습을 실황으로 보며 꽤 충격받았다고 들었다. 엄마가 생선구이를 반찬으로 내놓았더니 움찔하던 너는 생선이 불쌍하다며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는구나.

당황한 엄마는 원래 동물은 서로 먹고 먹히는 것이라는 설명부터 시작해 맛있는 음식이 된 생선은 다른 동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윤회·환생론까지 끌어들였다더라. 아빠가 듣기에는 별 설득력이 없었다. 겨우 한 젓가락을 맛본 너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이런 평을 남겼다고. 

"그래도 맛은 있네. 다음에는 꼭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엉엉." 

생선은 불쌍하고 구이는 맛있고, 어렵지? 사는 게 늘 어렵다.



# 중요한 것

엄마가 야근하는 날이면 그나마 아빠가 일찍 들어가는 편이다. 네 숙제를 챙겼으면 좋겠다는 엄마 부탁 때문에 전화했다.

"오늘 엄마 늦게 들어오는 거 알지? 아빠도 늦게 도착하는데 할머니 집에서 미리 숙제를 했으면 좋겠네. 집에 가면 너무 늦잖아. 숙제 먼저 하고 TV 보면서 기다렸으면 좋겠다. 숙제 미리 하면 집에서는 그냥 씻고 놀면 되잖아. 그렇게 하자. 어때 딸?"

잠시 답이 없어 무리한 요구를 했나 싶었다.

"아빠, 그런데 나 연필이 없어."

그래, 늘 중요한 것은 따로 있는 법이다.



# 대견하지만 섭섭해

설 연휴 외할머니 집에서 아예 지낼 생각을 했는지 집에 엄마 혼자 보내는 것을 보고 신기했다. 불과 2주 전까지 자기 직전에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찔찔 짜던 아이가 맞나 싶었다. 당연히 엄마도 이 상황이 낯설었을 테다.

엄마는 다음날 이른 아침 필요한 게 없나 싶어 전화했다. 너는 다짜고짜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 했다며 또 한방 먹였더구나. 배신감과 대견함이 어정쩡하게 섞인 엄마 표정이 혼자 보기 아까웠다. 덕분에 결혼 10년 차 아빠는 남는 건 남편밖에 없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 짧은 방학

갑자기 벌써 목요일이라며 비명을 지른 것은 미안했다. 그래도 연휴가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 그런 아빠 모습이 안타까웠나 보다.

"쉬는 날이 그렇게 아까워?"
"당연히 진짜 아깝지. 너는 방학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지 않아?"
"아빠, 방학은 원래 짧아."

연휴보다 짧은 방학도 있나? 자기 거 아까운 지는 아는구나 싶었다.



# 긍정?

하고 싶은 게 많다면서 도서관 사서, 의사, 가수, 선생님 등을 읊더구나. 꿈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네가 자라서 뭐가 되든 항상 바탕이 돼야 할 깜냥에 대해서 꼭 짚어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 해.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착한 마음, 그러니까 '착한 어린이' 할 때 착한 마음이 아니라 잘 안 돼도 실망하지 않고 쉽게 지치지 않고 어쨌든 좋은 마음인데… 뭐라 할까…"

"아빠, 긍정적인 마음 얘기하는 거야?"

그래, 그거! 잘 알아듣는구나.



# 이해

외할머니 집에서 며칠 지낸 너에게 또 외할머니 집에서 자라고 하니 이유가 궁금했겠다. 그냥 예지가 미워서 그렇다고 하니 낄낄 웃는 게 꽤 자신감 넘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밉다는 얘기가 나온 김에 갑자기 네가 아빠를 미워한 적이 없었는지 궁금했다. 걱정했는데 서슴없이 그런 적 없다기에 오히려 당황했다. 섭섭하게 한 적도 있고 무섭게 야단친 적도 있는데 말이다.

"속상한 적은 있지만 미워한 적은 없어. 나를 야단친 것도 사랑해서 그런 거잖아."

좀 가식적인 모범답안이지만 꽤 뭉클했다.



# 발음

아이폰에 설치한 번역 앱을 열어 한마디 해보라고 했다. '돨픈'이라고 하길래 뭔가 했다. '돌고래'구나. 아빠가 정확하게 '돌핀'이라고 발음하자 'dark king'이라고 인식하며 '어두운 왕'이라고 뜨네. 무슨 혓바닥이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애~뽀(사과)'와 '며억ㅋ(우유)' 성공하는 거 봤니?

"흐흐, 아빠 발음이 (인식)되는 게 더 신기해." 

요즘 스파트폰이 꽤 똑똑하다.



# 착한 손녀? 고약한 조카?

외할머니 방에서 TV를 보면서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 했다고? 외할머니께서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더니 굳이 다른 방에 있는 외삼촌을 불러서 물을 가져오라 했다기에 이유가 궁금했다. 외할머니가 편찮아서 그랬다더구나.

아빠와 띠동갑 어른이면서 카리스마 철철 넘치는 외삼촌은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호랑이는 하룻강아지 물 심부름을 씩 웃으면서 했다더구나. 아빠는 아직도 네가 효심 가득한 손녀인지 싹수없는 조카인지 결론을 낼 수 없다.



# 대통령

물론 뉴스를 보는 아빠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나운서 말끝마다 토를 다는 모습도 어른답지 않았다. 

"아빠, 아빠는 대통령 싫어하잖아. 만약, 만약에 내가 대통령이 돼도 나를 싫어할 거야?"

그게 대통령이 싫은 게 아니다. 대통령을 하는 사람이 문제라서 그렇지. 그리고 유난히 낯가림 심한 너에게 정치는 좀 버겁지 않을까?



# 조심

네 엄마가 소파에 널브러져 자는 너를 잠자리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예전에는 팔에만 힘을 줘도 가뿐하게 들어올렸는데, 또래보다 작다지만 이제는 안기 전에 심호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짝 안아서 천천히 들어. 허리 나갈라."

아빠를 향한 엄마 배려는 저 한마디로 쉽게 증명이 된다.



# 무슨 뜻일까?

너를 웃기는 게 아빠에게 작은 낙이다. 개그 하나 던졌는데 표정에 변화가 없어 실망했다.

"웃지 않아서 섭섭해."
"아빠! 으이그."

손가락 끝으로 아빠 코를 꾸욱 누르면서 웃더구나.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 말투가 느껴져 조금 놀랐다. 혹시 코를 누른 것은 귀엽다는 뜻이니?



# 크로스 체킹

"아빠는 결혼하고 나서 엄마랑 헤어지고 싶은 적 없었어?"

기습적인 질문에 적잖이 놀랐다. 취재가 날카롭구나.

"엄마가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얘기할 때 헤어지고 싶었어."
"어? 엄마도 아빠랑 싸울 때 그랬다던데 똑같네."
"뭐? 엄마도? 그럴 리가 없는데, 엄마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을 텐데."
"아냐. 아빠도 엄마한테 무섭게 얘기할 때 있잖아."

그렇게 양쪽에 물어서 확인하는 것을 아빠 회사에서는 '크로스 체킹'이라고 한다. 기특하구나.



# 번식

물고기 밥을 주고 나서 어항을 한참 쳐다보던 네가 한 가지 발견을 전했다.

"아빠, 물고기가 또 새끼를 낳았어요."
"그래? 예지가 밥을 잘 챙겨 줘서 그런가 보네."
"밥 잘 먹는다고 새끼를 낳나요."

생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대견하구나.



# 알까기

학교에서 친구와 알까기를 했다고? 자꾸 너에게 지던 친구가 다른 친구와 하겠다며 게임을 끝내겠다 했을 때 섭섭했겠다. 그래도 친구 마음 이해하지? 계속 게임에 지는 친구도 속상했을 테고, 졸지에 게임을 계속할 수 없는 너도 속상했을 테다.

"섭섭했지만 둘 다 화를 내지는 않았어. 친구는 다른 친구와 알까기를 하고 나는 심판을 봤어."

아주 좋은 해결책을 찾아냈다. 어른들이 참 못하는 정치라는 게 별 거 아니다. 핵심은 이해와 타협이지. 그나저나 지난해 아빠가 사내 알까기 대회에서 우승한 얘기 했나?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



# 용기

"아빠, 내가 용기가 없어요?"

네가 생각하는 용기라는 게 갑자기 궁금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용기? 괴롭히는 친구에게 야무지게 맞서는 용기? 어두운 곳을 혼자 걸을 수 있는 용기? 무서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는 용기?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용기인지 모르겠어요."
"진짜 용기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거야. 엄마·아빠가 서로 잘못한 거 없다고 싸우는 거 봤지? 예지는 잘못한 게 있으면 바로 인정하고 사과하잖아. 그래서 예지가 엄마·아빠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거든."

배시시 웃는 모습이 예뼜다. 항상 용기 잃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



# 언젠가는

6살 딸을 관찰하고 생각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딸은 지금 9살이고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다. 예전에 누가 '육아일기(育兒日記)' 잘 보고 있다고 했는데, 육아에 그다지 이바지한 게 없는 처지에서 굳이 이름 붙이면 '견아일기(見兒日記)' 정도가 맞다. 그냥 보이는 대로 옮긴 것이니 그 정도 이름이 적절하다.

딸은 고맙게도 사랑스럽게 자라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자식에게 보내는 애정 표현 같은 것으로 본다면 조금 곤란하다. 언젠가 한 선배가 딸을 통해 네가 보는 세상을 얘기한다고 짚었는데 훨씬 사실에 가깝다. 딸과 일상은 늘 새로 읽는 우화(寓話) 같은 것이다.

딸은 언젠가 쌓인 글을 보게 될 것이다. 싫다거나 민망한 기색을 보이면 미련없이 글을 끝낼 생각이다. 애초에 처음 글을 쓸 때부터 그렇게 맺고 싶었다. 대신 마지막 글 한 편은 이렇게 남기겠다.

"만약 너에게 내가 좋은 아빠라면 그런 아빠를 만든 게 바로 너라는 얘기를 꼭 해주고 싶었다. 내 안을 깊게 성찰하고 내 밖을 넓게 이해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 브로콜리

분홍색 바지 위에 빨간색 외투를 입은 너를 '딸기'라고 했다. 파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아빠에게 바로 '블루베리'라고 받아친 것은 아주 괜찮은 감각이었다.

"아빠, 브로콜리!"

방에서 엄마가 녹색 카디건을 입고 나왔다. 색깔은 물론 질감까지 딱 브로콜리여서 웃느라 쓰러지는 줄 알았다.



# 칭찬

분홍색 바지 위에 빨간색 외투를 입은 너를 '딸기'라고 했다. 파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아빠에게 바로 '블루베리'라고 받아친 것은 아주 괜찮은 감각이었다. 

"아빠, 브로콜리!" 

방에서 엄마가 녹색 카디건을 입고 나왔다. 색깔은 물론 질감까지 딱 브로콜리여서 웃느라 쓰러지는 줄 알았다.



# 학교와 학원

감기로 콜록거리는 너에게 힘들면 학교를 쉬어도 된다고 했다. 학교는 쉬겠다던 네가 오후에 피아노 학원은 가겠다더구나. 좀 이상하기는 했다.

"학교는 1교시, 2교시, 3교시 있지만 피아노 학원은 그런 게 없으니까."

마음대로 놀 수 있다는 말이니? 아침에 너를 병원에 데리고 간 엄마는 아파서 학교를 쉬니 피아노 학원에서도 조금만 놀고 외할머니 집에서 쉬라고 거듭 당부했다더라. 너도 흔쾌하게 그러겠다고 했다면서? 그런데 그날 오후 1시에 학원 가면서 외할머니께 오후 4시에 데리러 오라고 했다니! 그럴 거면 학교는 또 왜 빠진 것일까? 그나마 5시간 놀려던 것을 3시간으로 줄였나?



# 받아쓰기

알림장을 내밀며 사인해달라기에 내용을 봤다. 체크 항목에 '일기', '받아쓰기 틀린 것 3번 쓰기' 이런 게 있길래 확인하고 사인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냥 해도 된다기에 아빠는 다시 일기, 받아쓰기 보고 싶다 했다. 한 개 틀렸다며 방으로 쪼르륵 달려가는 뒷모습이 웃겼다. 

'어떡해'라고 써야 할 것을 '어떻게'라고 써서 한 개 틀렸더구나. 머쓱한 표정으로 아까웠다는 너에게 칭찬과 학습을 겸해 말했다. 

"예지가 받아쓰기 하나 틀려서 어떡해? 아니, 예지가 10개 중에 어떻게 9개나 맞출 수 있었어?"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이제 알겠다는 네 모습이 참 좋았다.



# 입원(1)

학교에서 뒤로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는 얘기를 예사로 들었다. 큰 병원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긴다고 하자 뒤늦게 심상찮은 느낌을 받았다. 서부산-동서고가도로-황령터널로 이어지는 빌어먹을 '만성 정체 구역'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운전대를 주먹으로 몇 대나 후려쳤는지 모른다. 큰 병원 도착 직전에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긴다는 전화를 받고 갑자기 숨이 찼다. 전화기 너머 구급차 사이렌 소리 또한 긴박했다.

도시고속도로-부산역-대신동-아미동으로 이어지는 그 빌어먹을 '정체 구역'이 또 애를 먹이기에 차 안에서 내내 쌍욕을 내뱉었다. 부산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만난 너는 눈이 풀린 상태에서 계속 구토했다. 자꾸 잠이 들려는 너에게 의사는 재우지 말고 계속 질문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지금은 일단 깨어 있어야 된다고 했다. 아빠 이름을 거듭 물었더니 간신히 대답하는데 참 견디기 어렵더라.



# 입원(2)

머리를 감싸며 쩔쩔매는 네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오죽하면 두통을 덜겠다고 진통제 주사조차 달갑게 맞더구나. 구토는 이어지고 겨우 물만 한 모금씩 마셨다.

의사가 CT 사진을 보여줬는데 뒤통수에 살짝 금이 가 있었다. 그래도 의사는 함몰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더라. 출혈은 이마 쪽이었고. 출혈과 부종 상황에 따라 수술 여부를 결정한다기에 주문처럼 '괜찮을 거야'를 되뇌었다. 의사는 당연히 최악인 상황과 부작용도 설명하는 게 의무다. 감정을 담지 않은 담담한 설명을 겨우 듣고 병원 구석에서 한참 울었다.



# 입원(3)

아기 때부터 그랬다. 너무 아프거나 속상하면 콧구멍은 커지고 입꼬리는 아래로 축 처지며 참 서럽게 울었다. 링거를 꽂은 손으로 머리를 눌러가며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속상했다. 더군다나 도대체 통증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게 더 속상했다. 그나마 병원에서 준 통증 체크카드가 꽤 유용했다.

통증 때문에 울 때면 너는 일관적으로 8~9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진통제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고 통증이 조금 가라앉으면 손가락은 4를 가리켰다. 나름대로 통증 정도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싶어 엄마에게 전했다.

"너무 아프지만 눈물이 나올 정도는 아니면 '6'이라고 하던데, 우리 딸 참 정확하네."

그 와중에 네 엄마는 나름 엄정한 분류 능력이 뿌듯했나 보다. 물론 아빠도 동감한다.



# 입원(4)

의사가 뇌압을 낮추는 약물 치료를 결정한 것은 좋은 신호였고 또 나쁜 신호였다. 당장 수술하지 않을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게 좋았고 약물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게 나빴다. 구토가 멈추지 않는다니 토하더라도 먹이라고 했다. 일단 먹는 게 중요하다고.

물만 마시던 너는 어느새 입술마저 하얗게 뜨기 시작했다. 틈날 때마다 먹고 싶은 것을 묻고 또 물었지만 그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물만 달라던 네가 매우 짠했다. 

"아빠, 솜사탕요. 솜사탕 먹고 싶어요." 

간신히 내뱉는 주문에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일단 물만 아니면 다 괜찮다.



# 입원(5)

역시 먹는 게 가장 문제였다. 병원 밥은 거의 그대로 들어왔다가 그대로 나갔다. 그 잘 먹던 빵, 떠먹는 요구르트, 뿌셔뿌셔, 초콜릿, 아이스크림, 심지어 라면조차 네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아무 기대 없이 얘기한 돼지국밥에 반응을 보일 줄 몰랐다. 국물을 받아온 곳은 병원에서 좀 떨어진 돼지국밥집이었다. 1인분은 포장을 하지 않는다기에 억지로 2인분을 받았다. 밥을 조금 말았더니 드디어 깔짝깔짝 몇 숟가락을 뜨더구나. 겨우 몇 숟가락이었지만 흐뭇하고 뿌듯했다.

"아빠, 저녁에 국물 또 먹을게요."

처음으로 마음 편한 웃음이 나왔다.



# 입원(6)

의사가 뇌압 낮추는 약 투여를 일단 멈춰보자고 했다. '9-1-5', 그러니까 오전·오후 9시, 1시, 5시 하루 여섯 차례 투약했던 거 말이다. 다시 견딜 수 없을 만큼 통증을 호소하면 따로 대처하겠다고 했다. 투약을 멈추고 상태를 보자는 것은 당연히 좋은 신호였다. 수술 걱정과 다시 한 발짝 멀어지는 조치니까. 약을 멈췄을 때 생길 수밖에 없는 통증을 얼마나 잘 견딜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돼지국밥 국물 특수는 얼마 가지 않았다. 그 시점에 외할머니가 챙겨 보낸 미역국이 대체제 역할을 한 게 다행이었다. 그래 봤자 밥 두세 술에 국물 조금 먹는 정도였지만 그 정도도 훌륭했다. 초콜릿과 라면 과자, 바나나우유를 식사 목록에 올린 것도 작은 성과였다.



# 입원(7)

그러고 보니 네가 3일 이상 입원하면서 6인실을 쓴 것은 처음이다. 1~2인실을 쓰고 싶었으나 자리가 나지 않았다. 엄마는 6인실 환경을 너무 힘겨워했다. 아빠는 바로 누우면 짧고 모로 누우면 좁은 보조침대 때문에 발목과 어깨가 결리고 네 오줌 변기를 수시로 비우는 것 말고는 견딜만했다.

네 침대를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먼저 유방암으로 입원한 할머니. 귀가 잘 안 들려서 할머니도 가족도 목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일상 대화가 싸움(?) 같았다. 그 옆에 젊은 아줌마는 아픈 아들과 함께 있는 딸에게 하는 말 대부분이 욕이었다. 할머니와 이 아줌마는 서로 시끄럽다고 투덜거렸다. 

맞은편 유방암으로 입원한 아줌마는 괄괄한 성격으로 우리 방 반장 역할을 했다. 우리 맞은편 침대는 호흡기 질환으로 입원해 잠 못 들고 내내 칭얼대는 아이와 아이에게 시달리는 엄마가 있었다. 

"아빠, 저 옆에 아줌마는 좀 심한 거 같아." 

당연하지. 자식을 향한 거친 쌍욕이 문화적 충격이었을 테다. 그나저나 이제야 옆 침대 사람들이 보이고 말이 들린다.



# 입원(8)

오래 자지는 않지만 깊이 자는 아빠는 그래도 새벽에 네가 끙끙거리는 소리만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앓는 소리는 통증 때문이기도 했고, 통증이 아닌 것 때문이기도 했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머리를 만져달라고 할 때는 분명 통증이었고, 아프지는 않지만 울기만 할 때면 통증은 아니었다. 그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헬멧을 쓴 것처럼 부어서 충격 부위를 알 수 없던 머리가 이제야 촉감만으로 위치를 알 수 있게 됐다. 봉긋 솟은 부위가 얼굴 쪽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짠했다. 의사는 맥박과 산소 공급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만 남겨놓고 링거도 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잘 먹여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환자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게 많은 만큼 회복하고 있다는 신호일 테다. 한결 홀가분해진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모습이 참 반가웠다.

"지금쯤이면 2교시 수업이겠지?"

몸도 마음도 점점 일상을 향하는 모습에서 모처럼 힘이 솟았다.



# 퇴원

CT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의사에게 들었던 각종 예상 후유증을 애써 지우고자 했다. 의사가 입원실로 들어오는데 표정부터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학교 가야지. 괜찮아?"
"네."

비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충분히 크고 또렷하게 들렸다.

"입원실 환경이 좋은 것도 아니고 이제 통원 치료를 하지요. 검사 결과 이상 징후는 없네요. 6개월 정도 보는데 지금 같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고생했다. 너는 곧 일상을 되찾을 것이며 엄마는 꾹 눌렀던 몸살 기운이 이제 뻗칠 것이다. 아빠는 정수리 근처에 새끼손톱만 한 원형 탈모가 생겼다더구나. 그 정도는 충분히 지급할 만한 대가다. 그동안 잘 견뎠고 앞으로도 잘 해내길 바란다.



# 후유증

별 이상 없이 잘 회복하는 네가 대견하다. 

그나저나 네가 알라딘 요술램프 문지르는 듯 머리를 어루만지면 대부분 요구가 이뤄진다는 사실을 알아챈 듯하다. 먹고 싶은 것은 언제든 먹을 수 있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다. 너는 아마 그 특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먹기 싫은 밥과 반찬을 앞에 두거나 미뤄서는 안 될 숙제를 해야 할 시점에 너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엄마, 머릿속이 흔들려요." 

불과 3분 전에 <런닝맨>을 보면서 깔깔 뒤집어지던 아이가 말이다. 그래도 엄마와 아빠는 6개월만 봐주기로 했다. 혹시나 진짜 아픈데 엄마와 아빠가 의심하면 너는 얼마나 서럽고 또 아프겠냐.



# 거래

옛날에는 아이들이 하도 무시받고 괴롭힘을 당해 1년에 하루 만이라도 잘해 주자고 '어린이 날'을 만들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요즘 아이들은 1년 내내 상전도 그런 상전이 없다. 그래서 아빠는 '어린이 날' 따위가 왜 필요한 지 모르겠다 했고. 

"에이~ 아빠, 나도 어버이날 선물 준비할게." 

하이파이브를 할 수밖에 없었다.



# 성동격서

"아빠, ○○이는 아빠가 출근할 때 술 마시지 마라고 해. 그런데 꼭 마셔야 한다면 한 잔만 마시라고 한데. 그래도 ○○이 아빠는 술 많이 마시고 들어온다는 거야."

느닷없이 친구 얘기를 꺼내면서 아빠를 쳐다보는 눈이 말똥말똥했다. 그나저나 옆으로 돌려 치는 기술은 어디서 배웠니? 그 상황에서 아빠라고 뭐 할 말이 따로 없었다.



# 2층 버스

2층 버스가 지나가길래 너에게 알려줬다.

"와, 타고 싶어!"

이 말을 반복하는 네 마음을 알아채기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지붕 없는 버스 2층에서 뻔히 아는 동네를 구경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공기도 별로 안 좋고 재미도 없겠다."
"아빠, 무섭지?"

오호! 남자 자존심 건드는 기술은 누구에게 배웠을까?



# 피구

학교에서 피구를 했다면서?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일단 해명부터 들었다.

그래, 날아오는 공을 가까스로 피했는데 공에 맞았다며 아웃을 선언하는 친구에게 안 맞았다고 설명하는 동안 다른 친구가 던진 공에 맞았다 그거지?

"공이 아프지는 않았는데 억울했어."

아빠 어렸을 때부터 '오징어 달구지 금 밟는 문제', '축구할 때 핸들링' 문제와 더불어 피구 공 맞는 문제는 늘 난제였다. 충분히  네 변호에 공감했다.



# 나는?

이사 간 집 어때? 괜찮니? 10년 남짓 정리하지 않은 물건을 한 번에 처리하느라 식겁했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나라에 가면 마트를 차려도 될 만큼 뭐가 나오더라. 아빠가 조금 과장해서 아내 빼고 다 버린다는 각오로 물건을 정리했다고 했다. 

"나는?" 

늘 그렇듯 날카롭구나. 너에게 큰 실수를 했다.



# 침대

개인 침대가 있으면 혼자 잘 수 있겠다고? 아직도 눈 떴을 때 엄마가 안 보이면 징징거리는 네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때 엄마가 옆에 같이 누우면 되지." 

그래,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하다. 그러면 아빠는 침대 사준 보람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 보물

네 전화 벨소리가 한참 울려서 들여다봤더니 너는 낮잠을 자고 있고 전화기 혼자 울더구나. 전화기를 보니 '나의 보물 엄마'라고 뜨네. 엄마와 네 전화기로 통화를 하고 나서 갑자기 아빠는 어떻게 저장됐는지 궁금했다. 신화시대부터 호기심으로 망한 인간이 한둘이 아닌데 너에게 전화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보물 아빠'.

잠깐 심장이 쫄깃했다.



# 전학

전학한 학교는 어떻니? 친구들은 잘해 주니? 늘 말하지만 하루하루가 그저 재밌으면 좋겠다. 며칠 전 전학 수속을 마치고 학교를 나오면서 꾹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짠하더라. 아빠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하면서 엉엉 울었거든. 그런데 전학하고 첫날 학교에서 재밌었다고 깔깔거리는 모습을 보니 참.



# 짝지

전학한 학교에 적응하기도 힘든데 버거운 짝을 만났나 보구나. 너를 괴롭히고 놀린다니 마음이 아팠다.

앞으로 너를 힘들게 하는 친구가 있으면 속상해하지만 말고 자세히 관찰하고 추리해봤으면 좋겠다. 뭐든 상식을 넘어 뭔가 지나치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나치게 말이 많거나 장난을 거는 것은 대부분 외로움 때문이다. 관심이 필요하다는 거야.

네 실수를 빌미로 놀렸다고? 그것은 자기가 얼마나 강한지 잘하는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약하고 자신감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 실수를 자기가 잘난 근거로 삼는 법이다. 어른도 마찬가지고.

너는 어떠니? 강한 아이니? 강한 아이는 약한 아이가 괴롭힌다고 우는 거 아니다. 건투를 빈다.



# 배틀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달 /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아침부터 식탁에 앉자마자 동요 배틀이 들어오기에 승부를 피할 수 없었다. 지체 없이 받아쳤지.

"딸 딸 무슨 딸 쟁반같이 둥근 딸 / 어디 어디 떴나 식탁 위에 떴지." 

너도 엄마 닮아서 패배는 싫어하더구나. 바로 시작하는 선공이 매서웠다.

"밥 밥 무슨 밥!"
"(아빠는 그 정도로 당황하지 않는다) 냄비 위에 볶은밥!"
"(이번에는 네 차례!) 어디 어디 떴나?"

솔직히 받아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숟갈 위에 떴지."

네 감각도 훌륭했다. 나이스!



# 뜻밖에 해답

짓궂은 짝지 때문에 힘들어하던 너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모든 지나친 행동에는 이유가 있으며 관찰과 추리로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엄마에게 들으니 짝지 문제가 해결됐다고? 너에게 아빠 조언이 거둔 성과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짝지를 잘 관찰했어? 어땠어? 이제 이해가 좀 돼?"
"아니, 짝지가 바뀌었어. 너무 떠든다고 한 줄 뒤로 갔거든." 

그렇게 느닷없이 해답이 튀어나오기도 하는 게 삶이다. 새 짝지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 상대성이론

그러니까 네가 무거워지고 달려오는 속도가 빠를수록 그걸 받아내야 하는 사람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공식으로 쓰면 E = mc^2 되겠다. 현재 상황을 보면 네가 달려오는 힘(E)을 봤을 때 외할머니는 중상, 엄마는 타박상, 그래도 아빠 정도가 겨우 받아낼 듯하다. 

"아빠~." 

멀리서 팔을 벌리고 후다닥 달려오는 너를 보며⋯ 흡!



# 칼로 물 베기

"아빠, 칼로 물 베기가 무슨 뜻이야?"

다른 아빠들은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다만 아빠 방식은 이렇다. 물을 담은 그릇을 놓고 과도를 넣어서 이리저리 휘저었지. 기합까지 넣으면서.

"아빠 뭐해?"
"칼로 물 베잖아."
"쓸데없는 짓이구나."

그래, 정확하게 이해했다.



# 센스

네가 전화로 퀴즈를 하나 내겠다고 했을 때 무슨 일인가 했다. 그러고 보니 전화 퀴즈는 처음이구나.

"아빠, 들깨를 먹으면 잠이 일찍 깨, 안 깨?"
"덜 깨!"

깔깔 웃으며 딩동댕을 외치는 목소리가 참 반가웠다. 그나저나 네 엄마는 같은 문제를 냈더니 들깨와 자는 건 별로 상관없는 것 같다 했다고? 숨이 턱 막히더라. 오죽하면 아빠를 찾았겠나 싶었다. 좀 더 크면 아빠도 답답·갑갑했던 거 얘기해줄게.



# 느낌이 왔어

1부터 100까지 사이에 숫자 하나를 생각해보라 했잖아. 아빠가 생각한 숫자를 맞춰보겠다고? 좋다!

고개를 끄덕이며 숫자를 생각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 설마 한 번 만에 맞출 생각이니? - 조심스럽게 숫자 하나를 말하더구나.

"72?"
"어! 어떻게 맞췄어?"

순간 흠칫 놀라는 표정 봤다. 하지만, 너는 곧 별 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돌아오더구나. 마치 늘 있는 일처럼 말이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앞에서 서성거리는 게 뭔가 설명하고 싶은 게 있니?

"어떻게 맞췄는지 알아?"
"아니, 진짜 신기하네."
"그냥 느낌이 왔거든."

활짝 웃는 모습이 좋더라. 아빠는 네가 72를 외칠 때 느낌이 왔다.



# 신고

길에서 주운 머리고무줄을 아파트 경비실에 맡기며 주인 찾아 달라고 했다면서? 경비실 아저씨가 "너는 필요하지 않니"라고 물은 이유를 아빠는 너무나 쉽게 짐작됐다.

"저는 집에 머리고무줄 많이 있어요."

아저씨가 주인 꼭 찾아주겠다고 했다니 다행이다. 그나저나 무더운 요즘 다른 일도 힘들 텐데 동심을 파괴하지 않은 아저씨께 고맙더구나.



# 주거니 받거니

제목도 어려운 무슨 무슨 무슨 책을 세 권이나 읽었다기에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예쁘고 똑똑하네."
"글쎄, 유전자 탓인가?"

네가 이제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를 아는 것 같아 흐뭇했다.



# 누구 덕?

엄마가 만든 샌드위치가 맛있었니? 네가 환하게 웃으며 최고를 외치자 엄마는 새침데기 같은 표정으로 잘난 척하더구나. 그 모습을 보며 배시시 웃던 네가 아빠에게도 동의를 구했지다.

"엄마 진짜 음식 잘 만들지."
"그럼, 이렇게 음식 잘 만드는 엄마를 누가 골랐지?"
"아빠?"

그래, 상황이 아무리 복잡해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게 바로 본질이다.



# 기습

양손으로 엄마 볼을 잡고 좌우로 흔들며 도리도리 하는 너를 보고 아빠가 당장 선을 그었다.

"내 아내 갖고 놀지 마!"
"그래? 그럼 아빠."

어느새 아빠 볼을 잡고 좌우로 흔들더구나. 정말 예상 밖이었다.



# 고양이

웬만해서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 아빠가 봄에 약속한 고양이 입양을 지금까지 미뤘던 것은 그냥 싫었기 때문이다. 엄마·아빠 삶에 반려동물은 없었거든. 집안에 동물을 키운다는 게 낯설고 두렵다. 차차 체감하겠지만 한 생명을 뒷바라지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그나마 생기기는 착하게 생겼다. 잘 돌봐주기 바란다. 한 생명과 정성껏 교감하고 삶이 지닌 무게도 제대로 느꼈으면 좋겠다. 잠투정하는 거 보면 너 아기 때 생각도 난다. 네가 지은 '하늘이'라는 이름도 괜찮았다.



# 보호자 노릇

"하늘이가 응가했어."
"하늘이가 잠투정해."
"하늘이가 자꾸 달라붙어."
"하늘이가 다리 위에서 자."
"하늘이가 할퀴었어."
"하늘이가 깨물고 핥아."

고양이가 하는 그거 최소 6년 정도 남짓 네가 엄마에게 했던 거다.



# 시험

엄마가 70점 받은 수학 시험지를 보고 걱정이 많다. 아빠는 수많은 네 강점 가운데 몇 안 되는 약점을 인간적으로 본다.

"예지, 시험 많이 틀렸던데 속상하지 않았어?"
"아니, 괜찮았어. 다음에 75점 받으면 되지. 그다음에 80점 받고."

당당한 표정에서 엄마가 보였다.



# 여행

여행, 맛있는 음식 먹기, 집에서 책·TV 보기 중에 특히 좋아하는 게 궁금했다. 

"여행요."
"여행? 왜?"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게 좋아요."

차로 이동하는 시간을 힘들어하던 게 생각났다. 새로운 것을 향한 여행길일수록 이동 시간은 길어지기 마련 아닌가?

"창밖에 지나가는 풍경을 계속 보면 지겹지 않아요."
"그래? 너 차에서 주로 스마트폰 보잖아."
"아빠, 으흐흐흐흐흐흐흐."

그래, 가끔 약점을 웃음으로 때울 줄도 알아야 한다.



# 감기 기운

감기 기운이 있어 학원을 쉬기로 했다면서? 그동안 피곤하다는 이유보다 신선해서 좋았다. 너도 알다시피 엄마·아빠 모두 학원은 물론 학교도 출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받아서 후회하는 상이 개근상이기 때문이다. 출석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퇴근하고 집에 들어간 엄마가 마주친 장면은 소녀시대 노래에 맞춰 방송댄스 연습을 하는 딸이었다. 물론 아빠는 잘 안다. 네가 억지로 학원에 갔다면 반드시 감기에 걸렸을 것이다.



# 플레이팅

기본은 넓은 접시에 음식을 조금만 담는 것이더구나. 건더기를 먼저 올리고 소스를 숟가락으로 조금 흘렸다. 아마 '플레이팅'이라고 하지?

"아빠, 떡볶이 달콤·새콤 진짜 맛있어요."

네 '엄지 척'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TV에 나오는 셰프 따위!



# 꼼수

네가 돼지국밥을 잘 먹는 것은 언제 봐도 신기하다. 우리가 가는 국밥집은 직접 담근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아 셀프로 마실 수 있게 한다. 한 잔은 거저고 추가는 잔마다 1000원을 받는구나.

"아빠 한 잔, 엄마 한 잔."

술을 안 마시는 엄마는 아빠 수작에 키득거렸다.

"예지도 한 잔?"
"아빠, 나 술 못 마시잖아."
"그러면 아빠가 대신 마셔줘야지."
"으흐흐. 아빠 꼼수!"

그래, 오늘은 두 잔이다. 그나저나 '꼼수'라는 말은 언제 배웠니? 용도가 아주 적확했다.



# 행복지수

TV에서 이런 것을 봤다. '불행하다'를 0점, '행복하다'를 10점으로 표시한 수직선에 너는 몇 점이냐고 한 초등학생에게 물으니 2점에 표시하더구나. 아빠가 얼마나 놀랐을까. 당장 너를 불러 같은 수직선을 내밀었다. 잠깐 고민하던 너는 씩 웃더니 7점에다 표시했다. 일단 한숨 돌렸고 어디서 3점이 빠졌는지 궁금했다.

"내가 실수했을 때 놀린 친구가 있었고 숙제가 많을 때." 

어쨌든 엄마·아빠 모두 불행 요소가 아니어서 한숨 돌렸다.



# 인정

"아빠, 저 사실 옛날에는 아빠가 엄마보다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커서 무서웠는데요. 이제는 아빠가 아빠 같아요." 

엄마가 주말근무로 회사에 있는 동안 아빠가 꽃구경을 시켜주기는 했다. 길에서 파는 회오리 감자와 솜사탕, 휴게소에서 파는 토르티야와 오징어 조미 튀김까지 네 맘에 들었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겠더라. 그래도 9년 만에 '아빠가 아빠 같다'는 고백(?)이라니!



# 허를 찌른다는 것

엘리베이터 앞에서 너는 갑자기 아빠에게 혀를 쭉 내밀며 메롱거렸다. 그 과감한 시도를 하면서 어떤 반응을 기대했을까? 최소한 이런 반응은 아니었을 테다.

"안 약오르지롱~."

순간 당황한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더구나. 모든 싸움은 상대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한다.



# 책임

아침마다 고양이 똥 치우는 일을 너에게 맡기는 것은 그 정도가 생명에 대한 최소한 예의기 때문이다. 그 정도도 돌보지 않겠다면 그냥 움직이는 인형이나 갖고 놀아야지. 더군다나 네가 원해서 맞은 식구다.

"나 키울 때도 힘들었어?"
"너? 하늘이 열 배는 힘들었어!"
"으흐흐 그랬겠다."

그나저나 아빠는 병원에서 고양이 털 알레르기 진단을 받았다. 저 말썽꾸러기를 어떡해야 하나?



# 산타

"아빠가 전에 산타 할아버지가 쓴 거라며 편지 준 거 기억나? 영어로 '하이, 아임 산타'라고 썼잖아. 내 펜으로."

낄낄거리는 네 앞에서 끝까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우긴 것은 당황해서 그랬다. 느닷없이 그렇게 들이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아빠는 산타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도 아주 많이. 빨간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배불뚝이 할아버지를 기다리지 않는 순간부터 사람은 스스로 산타가 될 수 있다. 네가 앞으로 사람 그리고 세상과 나눌 선물을 기대한다. 물론 아빠부터 챙기자.



# 색깔

핫핑크 같은 강한 색이 싫다고 했다면서. 연분홍이나 하늘색 같은 파스텔톤 색이 마음에 든다 했다고. 원색은 보통 자기 개성이 강한 사람이 좋아하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네가 상대적으로 배려심이 많지 싶다.

"엄마, 그런데 하필 휴대폰 담는 가방이 핫핑크야."

그러니까 그냥 휴대폰 담는 가방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면 간단하지 않을까?



# 자랑

시험 점수 좀 잘 받았다고 점수 못 받은 친구 놀리는 애들이 있었다며? 고작 그런 것을 자랑거리로 만든 어른 잘못이다. 자기가 더 가진 것으로 남을 돕지도 못하면서 자랑만 하는 것은 그냥 바보다. 자랑할 게 별로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빠가 예지와 엄마보다 힘이 세면 무거운 것을 들어주면 되잖아. 그러면 당연히 아빠 힘이 세다는 것을 알 테고. 그런데 무거운 것을 들지는 않고 힘세다고 자랑만 하면 어떻겠어?"

"진짜 우스울 것 같아. 그러지 마."

그래, 우스운 거다. 못난 짓이며 미련한 것이고 없어 보이는 거다.



# 탱고

요즘 피아노 음악에 맞춰 화면을 터치하는 아이패드 게임에 빠졌더구나. 날라다니는 손가락에 감탄하고 있다. 이거 아느냐며 연주한 곡이 영화 <여인의 향기> 탱고 장면에 깔리는 곡이였다. 당연히 잘 알지! 유튜브에서 검색해 탱고 장면을 보여줬잖아. 뚫어져라 보던 네가 감탄하더구나. 당연하지.



# 캐럴

"아빠, 이 노래 알아? 꿈속에서 본 화이트…"

너무 잘 아는 노래다. 그것도 영어로. 중학교 때인가? 실기시험 쳤거든. 자랑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아임 드리밍 오브 어 와잇 크리스마스…"

'와잇' 들었니? '화이트' 이러면 없어 보인다. 밝은 표정으로 손뼉을 치는 너를 보며 이번에도 오디션(?) 통과를 확신했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구나."

혼잣말인 듯 혼잣말 아닌 혼잣말 같은 말을 듣고 갑자기 궁금했다. 노래가 궁금했던 거 맞니?



# 찰떡궁합

"아빠, 하나 둘 셋 하면 김치와 단무지 중에 하나 말해 봐. 하나 둘 셋!"
"김치!"

우리는 동시에 김치를 외쳤다. 똑같다며 배시시 웃는 얼굴이 좋더라. 하나로는 검증이 어려웠는지 몇 개를 더 제시하더구나.

△연필 - 지우개 △책 - 종합장 △의자 - 책상 △수첩 - 공책 △치약 - 칫솔 △짬뽕 - 짜장

연필, 책, 의자, 수첩, 치약 그리고 짜장이었다. 아빠는 100% 너와 똑같은 답을 해냈다. 솔직히 연필까지는 운이었다. 일단 네가 먼저 말한 단어를 답으로 말하는 패턴을 금방 파악했다. 그 뒤로는 뭐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짜장은 어떻게 맞췄을까? 네가 짬뽕보다 짜장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아빠, 우리는 찰떡궁합이에요!"

그래, 인정한다.

 

# 기억

엄마가 <어린왕자> 영화를 예약했다. 예전에 네가 잠들기 전 아빠가 자주 읽어줬던 책 가운데 하나였다.

"예지, 아빠가 옛날에 너 잠들기 전에 <어린왕자> 읽어줬던 거 기억나?"
"응, 기억나. 아빠, 아빠가 책 읽어주면서 먼저 잠들었던 거 기억나?"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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