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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to ye-ji

2014년 여덟 살

# 새해 프로젝트

2013년 마지막 날 조촐한 파티에서 네 새해 소망을 들었다.

"나도 잘할 테니까 혹시 내가 잘못해도 엄마·아빠가 화내지 않는 '친절한 가족'이 됐으면 좋겠어."

갑자기 무슨 서러운 기억이 떠올랐는지 펑펑 울었다. 엄마·아빠 마음 아는데 그렇게 얘기해서 또 미안하다니 무슨 아이답지 않은 배려인가 했다. 괜히 숙연해졌단다.

올해 우리 가족 프로젝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친절한 가족'이다. 올해도 잘 해보자.



# 질투

새해를 맞아 네가 손수 만든 연하장을 공개했다.

to mom and dad
Happy new year!

이렇게 달랑 두 줄인데 마음이 한없이 풍요로워졌다. 그나저나 엄마·아빠 부르는 순서를 정한 근거나 기준이 궁금했다.

"왜 맘 앤 대드야, 대드 앤 맘이면 안 돼?"
"왜?"
"아, 그냥 궁금해서."
"질투가 나서 그런 게 아니고?"

질투? 아니거든!



# 능력

누가 따로 단속하지 않으니 네 잠자는 시각이 한없이 늦어진다. 별 욕심 없이 너를 눕혀놓고 책을 읽어줬더니 10분도 지나지 않아 잠이 들더구나. 이럴 수가!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며 갸웃거렸다. 아빠 나이 39세가 돼서야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셈이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하는 삶을 사는 듯해 뿌듯했다.



# 목표

너에게 내가 어떤 아빠일까? 언젠가 누군가 너에게 아빠에 대해서 묻는다면 꺽꺽 넘어갈 듯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으면 좋겠다.

"우리 아빠 진짜 웃겨. 완전 재밌어."



# 호강

네가 읽는 책 내용이 참 재밌어서 제목을 물었다. <출렁출렁 기쁨과 슬픔>이라고. 여자·남자 주인공 목소리를 바꾸면서 읽는 것은 나름대로 연기겠지?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줄거리까지 받쳐주니 이보다 좋을 수 없구나



# 걱정

엄마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니 네 말발이 많이 세졌다. 이제는 엄마가 조금 부담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엄마가 갑자기 아빠에게 할 말이 생각났는지 대화 대상을 옮겼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너는 쪼르륵 엄마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고?

"엄마, 나와 싸웠다고 아빠하고만 친하기 있기, 없기?"

그러니까 평소에 잘하거라.



# 나도 힘든데

갑자기 먼 길 떠날 일이 생겼다. 친척 할아버지 한 분이 돌아가실 것 같다고 해서 말이다. 차를 타고 30분쯤 지났을까? 너는 몸을 이리저리 꼬면서 도착했느냐고 물었다. 도착 예정 시각이 3시간 넘게 남았는데 말이다. 엄마는 그냥 한참 남았다고 답하더구나. 네가 귓속말로 아빠가 운전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알겠다고 말했다니 참 기특했다. 물론, 왕복 7시간 동안 그 깨우침이 바탕이 된 말이나 행동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내 고통을 통해 상대 아픔을 아는 척하는 정도도 훌륭하다.



# 순위

네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늘 궁금하지만 너는 엄마와 아빠가 뭘 좋아한다고 생각하는지도 궁금했다.

"엄마는 홈쇼핑, 포코팡, 카톡, 예쁜 옷 입는 거."

포코팡? 휴대전화 게임 말하는 거니?

"아빠? TV로 영화 보는 거, 나, 엄마 그리고 음악?"

다른 것은 모르겠다. 하지만, 네 엄마가 홈쇼핑과 포코팡 사이에 아빠를 넣어야 하는 것 아닐까?



# 잔소리

할아버지 집 마당에서 강아지와 놀던 네가 신을 신을 채로 무릎으로 기어서 방으로 들어왔다. 이런 건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한다. 엄마는 당장 신을 벗으라고 했고 너는 구시렁거리며 신을 벗었다. 볼일을 보고 나가면서 방 안에서 신을 신으려는 너를 이번에는 아빠가 제지했다. 자상하게, 자상하게 신을 들고 밖에 나가서 신으라고 권했다. 신을 든 채 밖으로 나가던 네가 문을 닫으면서 한마디 남겼다.

"잔소리쟁이들."

잔소리 안 듣고 살기로는 대한민국 상위 5%인데 말이다.



# 플루

플루로 시달리던 네가 회복 단계로 접어들어 다행이다. 외출은 무리지만 집에서 놀 게 없나 뒤적거리는 모습을 보니 괜찮은 듯하다. 네 수발을 들던 엄마는 결국 뻗었다. 이런 계주는 늘 자연스럽다. 뻗어 있는 너에게 엄마 만한 아군은 없다. 하지만, 엄마가 뻗었을 때 너 만한 적군도 없지 싶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되지 않겠지만 아프지 말자. 그게 서로 돕는 거다.



# 공연

유치원 졸업 공연 잘 봤다. 매니저 역할도 충실한 엄마가 얼굴에 분칠도 해줬더구나. 출연자 5명 가운데 유일하게 너만 가면을 쓰고 나올 줄은 몰랐나 보다. 부엉이 역할이었나? 분칠은커녕 씻지 않고 가도 될 뻔했다. 어쨌든 장한 맺음과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



# 협상결렬

네가 짜장라면이 먹고 싶다고 했을 때 당연히 두 개는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짜장라면은 한 개뿐이고 그냥 라면이 몇 개 있더구나. 먼저 짜장라면을 끓여서 너에게 내놓고 라면 하나를 다시 끓였다. 아빠도 먹어야 하니까. 그냥 라면도 포기하기 어려웠는지 너는 같이 나눠 먹자며 협상을 시작했다.

"아빠도 짜장라면을 먹고 싶다고 했잖아."

쉽게 합의하고 라면을 끓였다. 하지만, 라면 하나 끓이는 몇 분 동안 네 짜장라면 그릇은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정한 거래를 이어가고자 그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지, 나눠 먹기로 했잖아."
"따로 덜 그릇이 없어서."

답이 그럴듯했다. 그래 놓고 라면도 먹겠다고?



# 칼칼한 맛

엄마가 너에게 먹이고 싶지 않은 음식과 네가 먹고 싶은 음식 목록이 놀랍도록 일치한다. 일요일 점심을 '된장라면'으로 때운 네가 이렇게 품평하더구나.

"칼칼하니 맛있었어."

엄마는 또 라면이냐고 했겠지만, 아빠는 칼칼한 맛도 아는 게 대견했다.



# 교가

네가 읊는 교가 가사가 사뭇 비장하다. '의에 죽고 참에 사는'이라니. 비장하기는커녕 비겁한 아빠는 그저 네가 '때 되면 죽고 재밌게 사는' 그런 아이였으면 좋겠다.



# 한 뼘 더

엄마에게 떨어지면 뿌앙 터지던 껌딱지 아기가,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울먹이던 어린아이가, 이제는 엄마·아빠가 외출하자고 부르는데 <런닝맨> 본다고 머뭇거린다. 또 그렇게 한 뼘 훌쩍 자라나 보다.



# 사회성

네가 아침부터 엄마에게 문제를 냈다.

"엄마와 아빠 중에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알아?"

엄마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자기를 지목했다. 네가 사회성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나 싶다. '둘 다'라는 답을 듣고 참 고소했다.



# 이혼

네가 느닷없이 엄마·아빠가 이혼하면 누구를 따라가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적잖게 당황했다. 

"아빠를 따라오면 좋겠지만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게 훨씬 많기 때문에 엄마를 따라가는 게 좋겠다."

너는 아직 결정하지 못 했으니 이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더구나. 참고 견디며 늘 행복을 탐구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 3대

네 할머니는 드라마 앞에서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으면서 리모컨을 살짝 빼면 보고 있다며 버럭 했다. 네 엄마는 드라마를 안 보는 것 같아서 채널을 바꾸려고 리모컨을 잡으면 뭐냐면서 눈을 부릅뜬다. 아빠가 채널을 돌렸던 이유는 네가 TV를 보지 않고 구석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보고 있는데 왜 그러냐며 울먹였다. 3대에 걸쳐서 이게 뭐냐!



# 추리력

추리력이었나? 엄마는 네가 그런 쪽으로 상대적으로 부족한 게 아닐까 걱정이 좀 됐나 보다. 나름대로 네 추리력을 끌어내겠다고 무슨 상황을 막 설명하더니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어찌나 교묘하던지 아빠가 덜컥 답할 뻔했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던 너는 그냥 되묻더구나. 엄마도 교육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을 테다.



# 성깔

"엄마 자신하고 나하고 아빠 중에 누가 제일 좋아?"

엄마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자기애와 모성애, 부부애까지 걸린 문제니까. 그래서 아빠가 나섰다.

"누구나 자신을 가장 좋아야 해. 자기를 좋아해야 뭘 하면 행복한지 알 수 있거든."

너는 두 번째는 누구냐고 묻더구나. 1순위를 먼저 말했으니 2순위는 네 답이 먼저 듣고 싶었다.

"엄마와 아빠 중에 누가 두 번째인지 모르겠어."
"엄마는 확실하게 예지가 2등, 아빠가 3등일 테고 아빠는 엄마가 2등, 예지가 3등."
"나는 엄마가 2등, 아빠가 3등."

은근히 성깔 있더라.



# 친구 집

"예지가 친구 집에서 놀다 가도 되냐고 전화했어."

친구 집, 전화, 엄마가 전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놀라웠다.

"그래서 허락했어?"
"허락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설레는 목소리여서."

엄마는 늘 그렇듯 첫 경험에 콩닥콩닥, 두근두근, 안절부절. 껌딱지 우리 울보는 그렇게 또 자라는구나 싶었다.



# 구출

네가 안긴 채로 뒤로 슬슬 넘어갔다. 아빠가 당연히 잡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모른 척했다. 더 넘어가서는 안 되고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지점에서 아빠를 부르는 목소리가 애절했다.

"아빠!"
"구해줘요 해야지."
"아빠, 구해줘요."

손가락 아홉 개를 펴서 '구(9)' 해줬다. 너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깔깔거리며 웃느라고 더 뒤로 넘어가더구나. 가까스로 다시 껴안았다. 어쨌든 유머 코드가 맞아서 다행이다.



# 재밌는 이유

함께 <무한도전>을 보면서 한참 웃는데 네가 갑자기 퀴즈를 냈다.

"아빠, <무한도전>이 왜 재미있는지 알아?"
"아니, 모르겠는데."
"유머가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그 유머가 뭐냐고! 정말 궁금했지만 잘난 척하는 네 표정을 보니 차마 더 묻기 어려웠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 알림장

네 가방과 아빠 가방 두 개, 외할머니가 준 반찬 등을 양손에 가득 들고 차에서 내렸다. 함께 차에서 내린 네가 아빠 휴대폰을 달라더구나. 집에 들어오자 너는 학교 알림장을 펴서 착한 일 적는 칸에 이렇게 적었다.

'아빠 짐을 들어줬어요'.

물론 거짓말은 아니다.

 

# 배신

"엄마가 더 좋아, 내가 더 좋아?"

"엄마를 먼저 좋아했고 예지를 나중에 좋아하게 됐고 지금은 둘 다 좋아."

그 평범한 질문에 이보다 비범한 답이 있을까?

"엄마는 아빠보다 내가 좋다던데."

그래? 답을 고쳐야겠다. 아빠도 예지가 더 좋다.



# AM-PM

엄마가 11시에 약속이 있다고 하니 너는 AM·PM을 물었다. 움찔하던 엄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AM'이라고 답했다. 잠깐 동안 신중하게 정답을 검토했을 테다.

"아, 밤 11시!"

너무 자신 있게 말해서 오답이라는 것을 파악하기까지 잠깐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허술하지만 당당한 모습이 참 좋았다.



# 투혼

엘리베이터에서 왼쪽 팔에 손을 건 너를 번쩍 들어올렸다. 대롱대롱 매달리면서 깔깔 웃는 너를 보던 엄마가 물었다.

"어깨는 이제 괜찮은가 봐?"

그러고 보니 전날 어깨가 아파서 소염제를 바르고 잤다. 엄마는 분명히 꾀병 또는 엄살이었다고 생각했겠다. 너는 위대한 사랑으로 기억했으면 좋겠다.



# 보복

"나는 어떤 아이야?"
"예쁘고 착한 아이지."

네 질문에 엄마 답은 충분히 예상했다. 오히려 이어진 질문에 조금 놀랐다.

"내 단점은 뭐야?"
"예지가 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어."

혹시 단점이 없다고 생각했니? 엄마 대답을 듣자 충분히 적극적이라며 자기를 변호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어쨌든 한 번 당했으니 갚아줘야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묻지도 않은 엄마 단점을 말하겠다니.



# 부당거래

엄마가 나가면서 너에게는 숙제를, 아빠에게는 청소를 시켰다. 둘 다 한참 개기던 중에 너에게 제안했다.

"아빠가 예지 숙제하고, 예지가 청소하면 안 될까?"
"아니!"

거래 과정에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단호한지는 모르겠더라.

"내 숙제는 아빠한테 쉽지만, 아빠 청소는 나한테 힘들어."

무엇보다 대구가 맞아떨어져서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허튼 수작은 통하지 않겠다 싶어 아쉬웠고.

 

# 아빠 장점?

"누구나 뭐든지 다 잘할 수는 없잖아?"
"그럼, 아빠만 해도 거짓말이나 나쁜 짓은 잘 못하지."

그 말을 들은 너는 뒤로 넘어가면서 웃었다. 왜? 한참 웃다가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른 네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아빠와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잖아. 그런데 아빠가 잘하는 게 뭐야?"

이번에는 엄마가 뒤로 꺽꺽 넘어가면서 웃었다. 왜!



# 경계

"얼굴에서 어디까지 볼이야?"

느닷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그런 질문이 좋다. 평범한 아빠라면 당황했겠지만 준비된 아빠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입에 바람을 넣었을 때 튀어나오는 데까지가 볼이야."

실제 입에 바람을 넣고 얼굴을 만지면서 볼을 확인하는 모습이 예뻤다.



# 스케일

생신을 앞둔 외할머니께 네가 무슨 선물을 하고 싶은지 궁금했다. 몸이 불편해도 늘 너에게 헌신한다는 것 정도는 잘 아는 것 같아 다행이다. 선물을 고민하면서 외할머니를 더 생각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부엌?"

다행히(?) 외할머니 집 부엌은 얼마 전에 리모델링했다. 엄마 닮아서 스케일이 크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이왕이면 좀 간단한 것으로 말이다.



# 잊지 않았구나

아빠가 가방을 메고 양손에 네 가방과 외할머니가 싸 준 반찬에 택배로 온 물건까지 들고 가다 보니 손에 쥔 휴대전화가 빠지려고 했다. 다급한 마음에 너에게 (휴대전화를) 구해달라고 했다. 너는 순간 멈칫하더니 씩 웃으며 손가락 아홉 개를 펴고 '구(9)'를 외쳤다. 잊지 않았구나!



# 모녀관계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트집 잡고 투정 부리고 짜증 냈다면서? 마지못해 엄마가 한마디 했더구나. 그러자 너는 울먹거리며 짜내 듯 한마디 했다더라.

"그렇다고 모녀관계가 나빠진 건 아니지?"

그 심각한 상황에서 엄마는 웃겨서 뒤로 넘어갈 뻔했단다. 나쁜 엄마다.



# 찌찌뽕

SBS <생활의 달인>에 등장하는 달인 기술을 보던 네가 감탄하며 한마디 했다.

"와! 대박."

그 정도로는 아쉬웠는지 한 번 더 강조하더라.

"와! 초대박."

갑자기 그 이상은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다. 초대박보다 더 대박은 뭘까? 질문을 받은 너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느낌이 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외쳤다.

"초초초초초대박!"
"찌지뽕!"

게다가 '찌찌뽕'까지 똑같이 외쳤으니 잘 가르쳤다 싶어 뿌듯했다.



# 다정한 모습으로

엄마가 새벽 출장을 가는 바람에 아빠가 학교에 데려다줬다. 차에서 내린 네가 갑자가 포옥 안겼다.

"아빠 사랑해, 잘 다녀와."

뺨을 비비더니 꼭 껴안고 뽀뽀! 손을 높이 들어 흔들며 인사까지 한 번 더! 가슴이 벌렁거릴 만큼 좋았다만 수위가 조금 높아 수상했다. 너는 이별 퍼포먼스를 마치고 주변에 지나가는 아이들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충분이 '다정한 아빠와 딸'처럼 보였을 것이다.



# 썬팅

네가 차 뒷자리에서 대단한 발견을 한 듯 말했다.

"아빠, 왜 선팅이 선팅인 줄 알겠어!"

신난 네 목소리가 반가웠지 내용은 기대하지 않았다.

"썬이 태양이잖아. 햇빛을 '팅' 튕겨내니까 선팅이지."

사실 아빠 회사에 그런 개그가 아주 전문인 선배도 있고 못지않게 즐기는 후배도 있다. 아빠 취향은 아닌데 네가 하니 느낌이 정말 다르다. 물론 두 말할 것 없이 아주 훌륭한 개그다.



# 나는?

날마다 튼실해지는 너와 달리 외할머니는 좋다고 달려드는 손녀를 잘못 껴안기만 해도 몸에 멍이 앉는다. 어쩔 수 없이 너에게 이런 식으로 달려들면 할머니가 이제 못 산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나는 누가 돌봐?"

이게 네 반응이었다더라. 그래, 나부터 살고 보자는 게 본능에 가깝기는 하다. 배려나 양보, 예절은 천천히 배우자.



# 노래방

처음으로 가족끼리 노래방을 갔다. 너는 경계심이 많은 아이답게 마이크를 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첫 노래를 불렀다. 16점이었나? 움찔하는 네 모습을 보고 살짝 후회했다. 괜히 어린 마음에 상처를 준 게 아닌가 싶었다.

아빠와 엄마가 한 곡씩 부르는 것을 본 너는 일단 질러 줘야 점수가 나온다는 것을 금세 알아채더구나. 다음 노래부터 훨씬 목소리를 키웠다. 각종 동요 메들리로 90점대를 기록하기 시작한 너는 '아기공룡 둘리'로 기어이 100점을 찍었다. 그제야 홀가분하게 마이크를 놓고 엄마와 아빠 노래를 비평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93점을 받자 그 정도면 잘했다고 격려하는 네 표정에 진심은 옅었지만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 산수

뭐든 곧잘 해서 칭찬 듣는 네가 산수는 좀 안 된다 싶으니 스트레스를 받나 보다. 산수 문제 풀지 않으면 안 되냐고 묻는 표정이 안타까웠다. 까짓 거 안 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 엄마가 앉아 있어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예지가 자동차를 만들어. 차 몸통도 이쁘게 만들고 유리도 잘 달았어. 핸들도 튼튼하고 색깔도 이쁘게 칠했네. 그런데 바퀴를 동그랗게 만드는 게 그렇게 힘든 거야. 바퀴는 그냥 만들지 말까?"
"그러면 차가 안 가잖아."
"산수도 바퀴 같은 거야. 만들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만들지 않으면 예지가 잘하는 다른 것도 아깝게 만드는 그런 거."

용케 고개를 끄덕인 너는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설득력이 대단했다고 자체 평가한다.



# 사과

TV 보면서 뒹굴거린다고 엄마와 약속한 숙제를 하지 않았다고? 약속을 어겨놓고 사과도 하지 않고 버텼다면서. 어쩐지 살벌한 엄마 포스에 눌려 마지못해 다가간 너는 이렇게 말했다더구나.

"엄마는 좋아하는 사람을 섭섭하게 했을 때 어떻게 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화해할 거야. 그렇지 않은 사람이면 그냥 안 보고 살고."
"나도 그래."

네 미안함을 그렇게 전하려 했나 보다. 엄마는 뭔 소리인가 싶어 순간 멍했다더라. 그 자존심이 뭔지 사과 한 번 하기 힘들지? 사실 엄마 성격이 좀 그렇다. 엄마 몰래 응원한다.



# 잘 다루는 거

"아빠는 잘 다루는 게 뭐야?"

질문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칼? 기타? 이렇게 예를 듣고 나서야 감이 왔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았다.

"엄마?"

옆에서 답을 들은 엄마가 입술 끝을 묘하게 들어올리며 웃는 표정은 누가 뭐래도 비웃음이었다. 그런데 깔깔거리며 뒤로 넘어가는 네 모습은 좀처럼 해석하기 어렵구나.



# 훌라후프

처음에는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훌라후프를 돌리더니 제법 요령이 붙었는지 훌라후프가 허리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었다. 그냥 잘 돌린다고 칭찬만 하면 너무 성의 없어 보일까 봐 디테일을 추가했다.

"아이고, 우리 예지 아기 똥배가 쏙 들어갔네."

수줍게 웃던 네가 훌라후프 RPM을 한 번에 끌어올리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 별명

친구들이 불러주는 별명이 없어 스스로 붙인 별명이 '이리'라고? 그래, 동물 이리. 왜 그런 별명을 지었느냐고 물었지만 이예지에서 '이'를 따서 붙였구나 생각했다. 그맘 때 정순영 별명이 '순대'였고, 이승환 별명이 '환타'였던 것처럼 말이다. 아주 흔한 감각이다.

"이리는 종종 화를 내고, 수줍음이 많아서 낯선 사람이나 동물을 피하는 게 나와 닮은 것 같아."

별명에 제법 그럴듯한 의미를 담은 게 뜻밖이었다. 더군다나 고작 8살 어린이가 나름대로 '자기 객관화'를 했다는 게 더 놀라웠다. 그거 어른도 잘 안 된다.



# 폭력

학교에서 3학년쯤 돼 보이는 오빠가 욕을 했다고? 그 말에 가슴 가운데가 뭘로 찔린 것처럼 아팠다는 얘기를 듣고 더 속상했다. 게다가 네가 잠시 들고 있던 친구 휴대전화를 빼앗아 너를 콕 쥐어박았다니! 일단 엄마가 선생님께 잘 얘기하는 것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물론 같은 일이 반복되면 결코 가만있을 일은 없을 것이다. 작은 폭력을 용납하면 더 큰 폭력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그 피해자가 꼭 네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엄마가 속성으로 전수한 '째려보기' 기술은 완성했니? 당했을 때 가만히 있으면 다음에 또 그래도 되는 줄 안다. 네 의사 표현을 분명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걱정 마라. 뒷일 수습하라고 엄마·아빠가 있고 어른이 있는 것이다.



# 경제관념

학교에서 '경제 체험 한마당'이라는 것을 했다. 벼룩시장 비슷하더구나. 네가 500원을 주고 친구에게 샀다는 고무딱지 3개를 보고 아빠가 이렇게 제안했다.

"다시 1000원 받고 팔면 되겠다."

그런 게 경제 아닌가? 씩 웃던 너는 의외로 단호하게 답했다.

"안 돼. 내 아이디어가 아니잖아."

재벌 나부랭이보다 훨씬 경제관념이 낫다고 생각했다.



# 본능

휴게소에서 산 워터젤리를 먹으며 엄마에게 한입 권하는 모습이 예뻤다. 그게 바로 효도다. 다만, 엄마 흡입력을 간과했더구나. 한 번에 쑥 빨려 들어가는 젤리를 보고 작은 손가락으로 빨대를 꽉 움켜쥐었지. 그게 바로 본능이다. 그리고 본능이 효도보다 앞서더구나.



# 오답

"선덕여왕이 모란꽃에 향기가 나지 않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했는 줄 알아?"

아빠는 주저 없이 나비가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땡! 벌과 나비가 없기 때문이야."

벌이 빠졌구나. 괜히 아쉬웠다. 너는 나중에 엄마에게 이렇게 묻더구나.

"신사임당이 모란꽃에 향기가 나지 않는 이유를 뭐라 대답했는지 알아?"

선덕여왕이 왜 갑자기 신사임당으로 바뀌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역시 엄마도 벌을 빼고 나비만 말했다. 주입식 교육 문제인가? 어쨌든 오답 선언과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렸다.

"딩동댕!"

선덕여왕과 신사임당 차이니, 아빠와 엄마 차이니? 아직도 땡과 딩동댕 차이를 종잡을 수 없다.



# 기억력

얼마 전에 안아 올리는데 묵직했다. 지금도 좋고 앞으로도 한참 자라야겠다만 존재감을 의심할 정도로 가볍던 꼬마 시절이 살짝 떠올랐다.

"예지야, 너 아기 때 아주 작고 가벼워서 아빠가 네 귓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공중에서 빙빙 돌렸는데 혹시 기억 나?"
"아니. 그런데 아빠, 전에는 콧구멍이라면서."

그래, 무슨 구멍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코였구나. 뻥도 기억력이 받쳐줘야 뭘 해 먹든지 말든지.



# 앞줄

엄마는 네 키가 또래 평균에 못 미친다고 걱정이 많다. 덕분에 학교 예술제 합창 무대에서 가장 앞줄 가운데에 섰더구나. 40명쯤 되는 아이들 속에서 아주 쉽게 찾았다. 아빠가 그랬잖아.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이라고. 오카리나 연주도, 합창도 연습한 티 많이 났다. 애썼다.



# 설거지

설거지를 하는데 엄마가 보일러를 꺼서 따뜻한 물이 안 나온다고 했다. 너도 잘 알겠지만 사나이는 물 온도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켜야 할 자존심이지. 설거지할 때 고무장갑을 끼지 않는 것도 역시 자존심이다. 뭘 모르는 엄마에게 이 점을 다시 강조했더니 네가 물었다.

"아빠, 아빠 자존심이 설거지야?"

아빠가 한참 크게 웃었던 것은 할 말이 없어서였다.



# 또 성탄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학교에서 산타 존재가 화제인가 보다. 지난해 산타 할아버지가 남겼다며 너에게 줬던 카드를 들고 와서 산타가 한글을 아느냐며 따질 때는 움찔했다. 그 카드가 아직도 있다니! 순간 아빠가 썼다고 실토할 뻔했다.

이미 2년 전에 모든 것을 예상한 아빠는 너에게 산타에 대해서는 이미 방대한 세계관을 심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혼자 하루 만에 모든 일을 처리하기 힘들어서 전 세계 곳곳에 일을 돕는 사람을 심어뒀다는 그 얘기 마자. 그래도 내년까지 버티기는 어렵지 싶다. 너도 몇 년 더 선물 받으려면 그냥 모른 척 사는 게 좋겠다.



# 가장 원하는 사람

수학 시험에서 세 문제 틀려 85점 받았구나. 아빠는 애초부터 시험 점수 따위에 신경 쓰지 않기로 일찌감치 다짐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엄마도 신경을 쓸지언정 티 내지 않는 현명함 정도는 갖췄다. 그런데도 네가 엄마에게 시험지를 내밀며 선빵을 날렸더구나.

"엄마, 세상에서 제일 백점 받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그래, 네 마음이 그럴진데 옆에서 긁을 이유가 없다. 네가 앞으로 몇 점을 받더라도 백점 받고 싶은 그 마음은 잊지 않으마. 그나저나 네 선빵은 참 신선했다. 아빠도 엄마에게 용기 내서 말할 생각이다.

"여보, 세상에서 제일 돈 벌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



# 결론

차 뒷좌석에 앉은 네가 갑자기 물었다.

"왜 어린이는 어른이 되고 싶어 하고 어른은 어린이가 되고 싶어?"

그런 철학적인 질문에도 아빠는 늘 준비돼 있다.

"사람은 항상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

이어서 어린이니까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 어른이 아니어서 할 수 없는 것, 어른이기에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까지 간단하게 정리했다. 결론까지 말할까 잠깐 고민했으나 참았다. 열린 결말을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어린이일 때 장단점이 있고 어른일 때 장단점이 있으니 언제든지 행복하게 살면 되는구나."

네 깨우침이 정말 놀랍고 자랑스러웠다.



# 내 얘기

정기적으로 짝이 바뀌면서 자리를 헷갈렸다고? 한 친구가 자리를 잘 모른다고 얄밉게 얘기했을 때 짝이 바뀐 지 얼마 안 돼서 착각했다고 말한 것은 참 잘했다. 그런데 대충 넘어가면 될 일에 그 친구가 자기는 자리를 다 외운다며 또 얄밉게 얘기했다니 도가 지나치네. 그 상황에서 네 답은 너무 적확했단다.

"나는 네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얘기를 하고 있잖아."



# 덜렁이

아빠는 50리터 쓰레기봉투와 종이 쓰레기 두 상자, 재활용 쓰레기를 담은 봉투 하나를 한꺼번에 들었다. 지갑과 휴대전화, 담배와 라이터는 주머니에 챙겼고. 그 많은 쓰레기를 지정된 장소에 모두 처리하고 나서야 자동차 키를 챙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단다. 다시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잖아? 이 복잡한 상황을 너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아빠, 덜렁이!"



# 롱부츠

며칠 전 구입한 분홍색 롱부츠가 마음에 드나 보다. 입을 때마다 끼이고 불편하다며 짜증내던 레깅스나 스타킹도 군말 없이 입고 말이다. 부츠 신기 편하고 잘 어울린다면야 불편 따위야 뭐가 중요하겠니.

"아빠, 선생님한테 부츠 샀어요 하니까 선생님이 참 이쁘네 하셨어."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니 딸이기 전에 여성이구나 싶었다.



# 예절

엄마는 네가 느닷없이 전화로 '어머니'라고 부르자 어쩐지 불안했다더라. 끊기 직전에 할머니께 전해드릴 말씀 없느냐고 했다는 말을 했다니 아빠까지 불안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그날 저녁 상황을 확인했더니 그냥 학교에서 배운 높임말 연습 한 번 했더구나. 바르게 배우고 자라는 너를 속물(?)로 대하며 꿍꿍이를 계산했던 엄마와 아빠 모두 미안하다.



# 평가

예년보다 훨씬 줄었지만 올해도 많이 운 것은 사실이다. 산타할아버지께서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 테고. 많이 울었지만 착한 일도 많이 했을 테니 산타를 설득할 만한 착한 일을 얘기해보라고 했다. 갑자기 심각해지는 네 표정이 재밌었다. 다만, 한참 말이 없기에 또 우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했다.

"할머니 말 잘 들었고, 엄마 요리할 때 조금 도와준 적도 있어. 빨래도 함께 널었고, 방 청소도 했어. 그리고, 그리고…"

그래, 그 정도면 됐다. 메리 크리스마스.



# 각자 역할

빨간 외투와 분홍 외투가 검정 체육복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어두운 색 외투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면서? 엄마가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로 부탁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더라. 아빠라도 그렇게 권했을 거야.

"산타 할아버지께는 다른 선물을 얘기할 게 있어. 그냥 엄마가 사."

너 정말 산타를 믿기는 하니?



# 아까워?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며칠 전 와인을 꺼냈을 때 엄마가 잔을 내밀어서 살짝 당황했다.

"맛 괜찮아?"
"아니, 맛없어."

좌우로 고개를 젓는 동작이 지나치게 컸나? 그렇다고 엄마가 한 번 더 물어볼 줄은 몰랐다.

"진짜 별로야?"
"맛없다니까."

처음보다 더 커진 동작이 상당히 어색했나? 네가 상당히 날카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아빠, 엄마에게 주는 게 아까워?"



# 선배

겨울방학이 끝나고 2학년이 되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후배가 생긴다며 웃는 모습이 예뻤다. 그나저나 사실 확인은 분명하게 해야겠다. 어린이집 다닐 때도 유치원 다닐 때도 후배는 있지 않았니?

"그때는 나도 아기였잖아."

아, 자격! 나이만 처먹었다고 선배 행세하는 어른보다 낫다. 내일부터 9살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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