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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to ye-ji

2013년 일곱 살

# 질문

새해 들어 부쩍 질문이 늘었구나. '왜'로 시작해서 '왜'로 다시 이어지는 끝없는 질문 말이다. 대답하는 아빠야 물론 피곤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살면서 '왜' 만큼 본질적인 질문이 얼마나 있을까. 차마 대놓고 누구에게 묻지 못하는 것을 너는 당당하고 거침없이 묻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부러웠다. 당연히 아이가 누릴 특권이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으나 오랫동안 그랬으면 좋겠다.



# 역차별

차에서 내리며 네 가방과 엄마 가방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랗고 묵직한 봉투, 아빠 가방 두 개까지 모두 양손에 들었다. 노는 손가락 하나 없더구나. 네 손에는 달랑 인형 한 개뿐이었다. 엄마는 그냥 긴 종이상자, 그것도 속이 비어 있는 상자 하나를 들었을 뿐이었다.

너는 계속 엄마에게 도와주겠다, 같이 들어주겠다며 달라붙었다. 엄마는 거듭 괜찮다며 사양했다. 그냥 속이 비어 있는 상자였다니까! 그런 상황을 확인하고 나서야 정말 조심스럽게 도움을 요청했다.

“예지야, 아빠 거 하나 들어주면 안 될까?”
“아빠는 힘이 세잖아.”

힘이 세다고 힘들지 않은 게 아니란다. 단호한 거절에 섭섭하지 않으려고 꽤 애썼다.



# 잠투정

네 유치원 가방에 뭐가 가득 들었는지 궁금했다. 뭐가 들었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왜 궁금하냐고 앙칼지게 받아치니…. 아빠 성격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란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으니 너도 앞으로 궁금한 거 묻지 마.”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너는 일부러 그렇게 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며 훌쩍거렸다.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서 화해하려고 찾았더니 너는 이미 소파에서 널브러져 자더구나. 더도 덜도 아닌 그냥 잠투정이었다. 똘망똘망 말도 잘하고 하는 짓도 야무져서 가끔 잊곤 한다. 너는 이제 겨우 만 여섯 살도 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미안.



# 불공평

네가 엄마에게 울상을 하고 뭐라 얘기하는 중에 ‘불공평’이라는 말만 겨우 알아들었다. 내용은 모르겠으나 그런 세상을 용납할 수는 없어 이유를 물었다.

“엄마는 시원하게 긁고, 나는 가려운데 긁으면 안 되고.”

말은 알아들었는데 도대체 뭘 엄마는 시원하게 긁고 너는 못 긁는 것일까? 이럴 때는 확실히 엄마가 빠르다. 갑자기 뒹굴거리며 웃던 엄마는 손으로 조그맣게 네모를 그렸다. 아, 신용카드!

그래, 엄마는 시원하게 긁겠다고 하고 네 가려운 곳은 긁지 못하게 하다니 불공평한 게 맞다. 아빠도 엄마가 시원할 정도로 긁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너는 늘 공평한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



# 자존심

어제 날짜를 묻기에 왜 오늘 날짜가 아니라 어제 날짜를 묻는지 궁금했다. 혹시 오늘 날짜가 필요한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단호하게 ‘어제’라고 하더구나.

“22일.”
“아, 오늘은 23일이구나.”

자존심이 참 강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 우리말

네가 말끝마다 따박따박 대들자 늘 너그러운 엄마도 견디기 어려웠나 보다.

“이예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음부터 네가 해달라는 거 안 해준다!”

풀이 죽어서 방에 콕 처박힌 모습이 좀 애처로웠다. 너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펑펑 울면서 하소연했다.

“그러면 앞으로 나오지 말라는 말이야? 유치원은 어떻게 가라고? 방에서 나오면 안 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나오면’이라는 말이 그렇게 들렸구나. 사실 우리말이 좀 어렵다.



# 보너스

네가 갑자기 보너스가 뭐냐고 물었다.

“예지가 아이스크림 두 숟갈만 먹기로 약속했는데, 오늘 착한 일 많이 했다고 아빠가 한 숟갈 더 먹으라고 하면 그게 바로 보너스지.”

미리 준비한 듯한 매끄러운 설명 어땠니?

“진짜 좋은 거네. 아빠 회사에서도 보너스 줘?”

당연히 주지. 그나저나 너 정말 보너스가 뭔지 몰랐니?

 

# 민주주의

엄마에게 눈이 반쯤 감긴 상태에서 항의했다면서? 너에게는 일찍 자라면서 엄마는 TV 보고 늦게 잔다고. 많이 억울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네 엄마는 그 정도 항의로 결코 당황하지 않는 분이란다.

“엄마는 성장호르몬이 하나도 없지만 예지는 아직 성장호르몬이 많고 성장호르몬은 자는 동안에만 나오기 때문에 예지가 일찍 자야 키도 크고 예뻐지지. 엄마는 일찍 자도 성장호르몬이 나오지 않아.”

너는 오해했다며 바로 자러 갔다더구나. 이렇게 합리적으로 설득이 된다고? 어쨌든 우리 집 민주주의는 토론과 설득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보다.



# 상투적이지만

오랜만에 단둘이 밤길을 걷던 날 네가 이런 말을 하더라.

“아빠, 환한 낮도 좋지만 깜깜한 밤도 좋아. 예쁜 별을 볼 수 있으니까.”

아무 말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녹고 세상이 따뜻해지고 그랬다. 그럼, 밤도 괜찮지. 그런 상투적인 감상조차 마음에 쏙 들 정도니 말이다.



# 학습

요즘 네 말투가 유난히 사납고 짜증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엄마에게 네 말투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엄마는 누구한테 배웠겠느냐고 되묻더구나. 그날 아빠가 너를 안아주며 했던 말 기억하니?

“아빠도 기분 나쁘고 화나고 짜증날 때 밉게 말하는데 될 수 있으면 그러지 않을 테니 예지도 밉게 말하지 말자.”



# 한계

너에게 손바닥 만한 유치원 가방을 들게 했던 것은 아빠도 엄마도 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는 그 가방을 다시 낚아채더구나.

“나중에 질리도록 짊어질 텐데….”

다시 엄마에게 네 가방을 받아 들었다. 아빠가 제아무리 자애롭고 꼼꼼하니 어쩌니 해도 딱 거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 과장

장난감 거북을 보여주면서 ‘세상에서 가장 빠른 거북’으로 소개하더구나. 그 정도로는 아쉬웠는지 토끼보다 빠르고 차보다 빠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거북은 듣도 보도 못한 아빠는 유난히 그 거북이 빠른 이유가 궁금했다.

“원래 그렇게 태어났거든.”

추가 설명은 필요 없다만 너 좀 과장이 심하구나!



# 발음

앞니 두 개를 뺀 네가 아빠에게 [θ](뜨·쓰) 발음이 안 된다며 웃었다. 아가, 아빠는 앞니에 임플란트하고 스케일링하고 금을 씌워서 가그린을 수십 번 한다고 해도 그 영어식 번데기 발음은 안 된다.



# 등원 준비

네가 아무 도움 없이 옷을 챙겨 입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이런 게 성장이 아니면 뭐가 도대체 성장일까? 세수하고 머리 빗고 양말 신고 티셔츠 입고 원피스 디자인인 유치원복을 입더니 아빠에게 뚜벅뚜벅 다가오더구나. 그리고 등을 보이면서 아무 말 없이 두 손으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위로 들어 올렸다.

아, 지퍼! 바로 알아채지 못해 미안하다.



# 착각

볶음밥을 먹기 좋은 크기로 김에 싸서 줬다. 너는 소금 뿌린 김이 아니라며 미식가처럼 굴더구나. 마침 작은 종지에 간장이 들어 있어 살짝 찍어 먹으라고 권했다. 맛있게 몇 개 찍어 먹던 너는 종지를 내밀며 비밀을 알려 주더구나.

“아빠, 이거 딸기잼.”

참 달콤했겠다.



# 자전거

“도대체 엄마가 예지한테 안 해 준 게 뭐야?”

너에게 그토록 자애로운 엄마가 왜? 해 준 것은 늘 까먹고 안 해 준 것은 또렷하게 기억하는 고작 일곱 살 어린이에게. 어쨌든 네가 훌쩍거리면서 ‘자전거’라고 했을 때 조금 뜨끔했단다. 게다가 엄마가 돈이 없는 것까지 알고 있다니! 더는 미루지 못하겠더라.

기어이 약속했던 자전거를 사던 날, 너는 딱 일곱 살 어린이처럼 좋아하면서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신나게 돌았다. 내일이면 이 모든 희열과 고마움을 하얗게 잊겠지. 그래도 머리칼 흩날리며 작아지는 뒷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 가성비

엄마가 만든 피자를 먹고 기분이 꽤 좋았나 보다.

“엄마, 아빠! 내가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알아?”

당연히 엄마겠지. 미리 포기했는데 너는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며 예상을 벗어난 답을 했다. 아빠는 재밌고 엄마는 너를 끝까지 보살펴 주기 때문이라고? 아빠는 그저 재밌을 뿐인데 끝까지 보살펴 주는 엄마와 똑같다니. 이런 게 가성비 아니겠니.



# 몸치

대형마트 놀이터에서 공 무더기에 묻혀 한참 놀더구나. 너는 갑자기 공을 하나 주워서 벽으로 던지더니 튀어나온 공을 프라이팬 같은 장난감으로 받아치려고 시도했다. 그 모습이 테니스 선수 같았으면 좋았을 텐데…. 

튀어나온 공이 네 얼굴을 치고 딴 곳으로 튕겨나가고 나서야 뒤늦게 팔을 휘두르는 모습이 좀 안쓰러웠다. 그나저나 놀이터에서 놀고 싶다던 너 때문에 아빠는 기다리던 야구 경기를 휴대전화 문자 중계로 볼 수밖에 없었다. 너는 재밌었니?



# 교육

엄마가 뒤늦게 아이패드 게임 하나에 빠졌다. 패드를 좌우로 기울이면서 펭귄이 오래 달리게 하는 그 게임 맞다. 너는 평균 2000~3000m를 달리는데 엄마는 1000m를 채 넘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런 엄마에게 조용히 다가선 너는 목소리를 깔며 이렇게 격려했다.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지. 나도 엄마처럼 요리를 잘하지는 못하잖아. 엄마도 연습하면 나처럼 잘할 수 있을 거야.”

너를 윽박지르지 않는 엄마 교육은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 겸손?

집에 들어오는 아빠에게 달려든 네가 다짜고짜 방 청소한 것 봤냐고 물었다. 그제야 방을 둘러봤더니 제법 정리가 잘 됐더라. 칭찬을 생략할 수 없었다.

“힘들었지만 괜찮았어.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뭐.”

겸손이니?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를 까는 것조차 참 마음에 든다.



# 편지

아빠와 엄마에게 보낸 편지 잘 읽었다. 너에게 아빠는 재밌어서, 엄마는 낳아주고 도와줘서 고마운 존재였구나. 아빠와 엄마는 네 존재 자체가 고맙다.



# 새침하다

엄마 회사에서 울었다고 들었다. 동료 한 분이 지나가면서 왜 이렇게 ‘새침하게’ 앉아 있느냐고 물었던 게 원인이었다고? 어른들이 조용한 아이에게 던지는 평범한 덕담인데 속상한 이유를 잘 모르겠더라. 너는 엄마와 단둘이 남았을 때 엉엉 울면서 하소연했더구나.

“사무실에 계신 분 말이 너무 심했어.”
“무슨 말?”
“그거 있잖아. 예쁜데 가만히 있는 거.”
“새침하다는 말?”

'새침하다'는 형용사에 '예쁘다'는 뜻이 들어 있는지는 알 바 아니다. 이제부터 '새침하다'는 '예쁜데 가만히 있는 거'라고 정의하기로 했다.



# 해결책

실뜨기가 생각대로 안 되자 너는 울음을 터뜨리더구나. 이럴 때 얼른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빠 역할이다.

“예지야, 실뜨기를 하지 않으면 생각대로 안 될 일도 없지 않을까.”

순간 황당하게 바뀌는 표정이 우스웠다. 잠시 생각에 잠긴 네가 내놓은 답이 더 정답이더라. 그거 아니? 고민 끝에 답을 찾을 때면 네 얼굴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거.

“아빠, 잘 안 될 때는 한 번 더 해보고, 안 되면 다음에 한 번 더 하면 돼.”



# 오해

아침에 기분이 상쾌하지 않았는지 네 표정이 시큰둥했다. 하는 말마다 밉살스러웠고. 지켜보다가 영 아니다 싶어 이유를 물었더니 밉게 얘기한 적 없다고 딱 잡아떼더라. 밥을 먹으면서 이 문제를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예지가 밉게 얘기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예지는 밉게 얘기한 게 아니라고 했잖아. 어디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그러자 너는 손가락을 쭈욱 내밀며 소파 뒤를 가리켰다.

“저기, 저기서 그랬잖아. 기억 안 나?”

그러니까 아빠가 궁금한 것은 장소가 아니다.

 

 

 

# 예리하구나

라면 좋아하는 네가 먹는 모습은 어쩐지 어색했다. 젓가락으로 면을 집으면 밑에서부터 입에 넣으려고 하더라. 흔들리는 면발을 입이 쫓느라 힘들고 국물 떨어져서 지저분하고. 수정이 필요하다 싶어 냉큼 먹는 시범을 보여줬다.

“아빠, 아빠 라면으로 보여줘도 되는데.”

그래, 아빠 라면은 이미 다 먹고 없다. 너는 핵심을 놓치지 않는 대견한 아이구나.



# 위엄

최소한 너에게는 늘 상냥한 엄마와 한바탕 하고 나서 나중에 머쓱하게 내민 편지를 봤다.

“엄마 미안해요. 아까 내가 속상해서 그랬어요. 말을 잘못 알아들을 수도 있는데. 아빠랑 이야기했는데 화내는 않는 방법을 가르쳐 줬어요. 사랑해요.”

자질구레한 설명 따위는 됐다. ‘아빠 교육’이 낳은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단번에 알 수 있더구나.



# 이심전심

네가 MBC <무한도전>을 재밌게 보는 게 참 신기하다. 멤버들이 여고생과 짝을 맞춰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었는데 저녁에 하는 게임이 재밌더구나. 여고생이 짝이 된 멤버에게 몸짓으로 요리를 설명하면 짝이 그 요리를 짐작해 조리해서 갖고 오는 게임이었다.

 "예지, 먹고 싶은 거 몸으로 설명해 봐."

시켰지만 별 기대는 없었다. 어떤 조건을 걸어도 하기 싫으면 절대 하지 않는 네 성격을 잘 알거든. 그런데 슬며시 일어선 네가 손가락 두 개를 입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더니 입에 손부채질까지 하더구나. 벌떡 일어나 라면을 끓였다. 부엌을 빼꼼 들여다보던 네 표정이 참 해맑았다.



# 처세

엄마가 만든 피자를 맛나게 먹던 네가 갑자기 물었다.

“엄마가 만든 피자가 왜 이렇게 맛있는 줄 알아?”

조금 당황했다. 2년 전 아빠가 같은 질문을 너에게 했거든. 어쨌든 이유가 뭐니?

“엄마 정성과 사랑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지.”

그래, 공감한다. 다만 2년 전 같은 질문에 네가 한 답은 ‘프레스코 소스’였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정치적으로 꽤 성숙한 발언을 하는 아이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 역지사지

유치원에서 처음 보는 남자 애가 너보고 키가 작다고 했다며? 의연하게 ‘나는 원래 작다’고 받아쳤다기에 조금 놀랐다. 느닷없는 ‘선빵’에도 당황하지 않다니! 그래도 중요한 점 한 가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친구 외모를 막 평가하고 놀려도 되는 거야?”
“아니, 걔도 자기가 놀림을 당했다면 그렇게 못 했을 텐데.”

 그 정도면 훌륭하다.

 

# 난제

네가 엄마에게 진짜 어려운 문제라며 1002 더하기 1000을 물었을 때 이과 출신 아빠는 문과 출신 엄마가 괜히 걱정됐다. 다행히 엄마는 가뿐하게 2002를 계산해냈다. 그런데 왜 정답 확인을 해주지 않니?

“예지, 엄마 답 맞아?”
“몰라, 진짜 어려운 문제거든.”

그렇구나. 네가 답을 알았다면 ‘진짜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



# 어른

차려놓은 아침밥을 먹지 않고 버티더구나. 너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에 담긴 의미를 가르치고 싶었다.

“언니가 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가 많아지고 몸이 커지는 것과 아무 상관없어. 얼마나 많은 일을 혼자 할 수 있느냐는 거지. 혼자 할 수 있는 게 많아질수록 언니, 누가 도와주는 게 많을수록 아기.”

너는 슬며시 숟가락을 들더니 밥을 먹더구나. 그나저나 좋은 세상인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아빠 어렸을 때 너처럼 굴면 할머니께 그냥 얻어터졌거든.



# 순발력

외식하고 돌아오는 길에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엄마에게 투덜거리는 너를 그냥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바로 나무라기보다 미끼부터 던졌다.

“지금 아이스크림 사러 가는 길인데 엄마한테 밉게 얘기하면 돼, 안 돼?”

잠시 멈칫하던 너는 배시시 웃으며 ‘안 되지’라고 답하더구나. 그래, 그게 바로 순발력이다. 살면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지.



# 야바위

일찍 일어난 네가 아침 인사를 하며 아빠에게 다가왔다. 그런 너를 무릎에 앉히고 느닷없이 가위·바위·보!

아빠는 이길 때마다 볼을 내밀어 뽀뽀를 받았다. 연속 패배에 침울했던 너는 모처럼 승리하자 자신 있게 볼을 내밀더구나. 아쉬움을 과장해서 드러내며 네 볼에 뽀뽀했더니 그제야 네 표정이 밝아지더구다.

미안하다. 사실 이 게임 무조건 아빠가 이기게 설계돼 있다.



# 몽둥이

아빠 어렸을 때 뭐가 제일 무서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척 쉽다. 아빠 엄마, 그러니까 네 할머니는 아빠가 잘못할 때마다 몽둥이를 들었거든.

“그런데, 몽둥이가 뭐야?”

너를 곱게 키웠다는 사실은 이렇게 증명하기 쉽구나.



# 별명

슈퍼에서 빵을 사 오는 네 엄마를 '빵순영'이라고 불렀다. 성큼 다가온 너는 엄마가 '빵순영'인 이유를 물었다. 당연히 빵을 좋아해서라고 답했다. 자지러지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더구나. 잠시 멈칫한 네가 아빠를 빤히 쳐다보는 게 순간 불길했다.

“아빠는 술승환?”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그래도 응용력이 제법이구나. 잘했다.



# 봤냐고?

물론 아침에 네가 일어날 때마다 아빠가 웬만하면 ‘좋은 아침’이라며 너를 토닥거리는 게 일상이기는 하다. 그거 한 번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해서 무척 피곤한 아빠를 붙들고 따지듯이 말할 줄 몰랐다.

“아빠, 나 여기 있는 거 봤어?”

그러니까 네가 그냥 먼저 다가와도 되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 선택권

가족 나들이를 구상하는 아빠에게 너는 놀이동산 아니면 실내 놀이터로 가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선택권은 아빠에게 맡겼다. 이유는?

“운전은 아빠가 하니까.”

다양한(?) 선택권을 얻었으나 뭔가 개운하지 않은 이 느낌은 뭘까?



# 수줍음

네가 예쁜 드레스를 입힌 인형을 쭉 내밀며 이쁘냐고 물었다. 아빠는 솔직하게 인형보다 네가 더 예쁘다고 답했다. 모범답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픽 웃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빠가 말을 너무 재밌게 해서.”

많이 부끄러웠구나.



# 약속

점심으로 먹고 싶은 것을 물었더니 또 ‘라면’이다. 마침 소고기국이 있으니 점심 때 밥을 먹고 라면은 나중에 간식으로 먹자고 제안했다. 뜻밖에도 너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오후에는 외식을 제안했다. 외식 자체도 좋지만 ‘라면 약속’을 잊게 하려는 의도였다. 너는 당연히 약속부터 언급하는구나. 일단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곧 외식할 것이고 지금 라면 먹으면 배가 부를 것이고 배 부르면 맛있는 것을 먹기 어려울 것이고.”
“아빠, 아빠 말 알겠고 맞는 말인데 약속했잖아.”

아주 단호하네. 라면이 입맛에 맞았기를 바란다.



# 포옹

엄마와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던 네가 마지막 꼭대기 별 장식만 남겨두고 아빠를 찾았다.

“아빠, 안아 주세요.”

무릎을 꿇으며 그냥 포옹해줬다. 잠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너는 곧 자지러지게 웃다가 가까스로 부탁 내용을 수정했다.

“들어서 올려 주세요.”

이번에는 트리를 등지게 번쩍 안아 올렸다. 들어 올린 게 분명한데 아직 별 장식을 달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 꺽꺽 웃으며 넘어가더구나.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장난이 지나쳤니? 그래도 마음껏 웃는 네 모습은 늘 보고 싶다.



# 취향

엄마 특파원(?)이 네가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바뀌었다고 전했다. 덩치 크고 착한 아이를 제치고 다른 녀석이 치고 올라왔다는구나. 엄마 취재로는 이번 신인은 착하면서 조금 화도 낼 줄 아는 게 경쟁력이라고 했다. 조금 화를 낼 줄 아는 게 왜 경쟁력일까? 네 설명은 ‘든든해서’였다.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나저나 덩치 크고 착하면서 화도 낼 줄 아는 남자는 네 엄마가 이미 오래 전에 찾아낸 거 아니? 덕분에 여성 동지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도 하나 알게 됐다.



# 야구

너는 지우개 두 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지우개 한 개를 가리키며) 얘가 던져.”
“(다른 지우개를 가리키며) 그리고 얘가 쳐.”
“(치는 지우개를 던지는 지우개 주위로 한 바퀴 돌리면서) 이게 홈런이야. 아빠도 야구 알아?”

야구 아냐고? 정말 좋아한다. ‘3할이면 훌륭하다’는 말이 아빠 좌우명이거든. 이 말이 어디에서 나왔겠니. 언젠가 야구장 한 번 같이 가자. 그리고 목소리 깔면서 아는 거 얘기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맘에 든다. 설명도 깔끔했고.



# 동안

아래층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너에게 예쁘다고 칭찬한 것까지는 좋았다. 아저씨가 너에게 다섯 살쯤 되냐고 물었던 게 꽤 신경 쓰였나 보다. 두 분이 내리자마자 눈을 깔면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에 뒤끝이 가득했다.

“7살인데, 내년에 학교 가는데.”

네가 동안이라서 그런가 보다.

 

# 고자질

네가 아빠와 복싱을 즐기는 이유야 뻔하다. 맞지 않고 때릴 수만 있는 복싱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오늘도 수비 자세를 취하며 네 주먹에 적당히 당하다가 한 방 잘못 맞았다. 물론 7살 여자아이 주먹이 줄 수 있는 충격은 아무리 과장해도 별 게 없다. 괜히 뒹굴며 엄살 한 번 피웠을 뿐이다.

“예지, 엄마한테 다 말해!”
“에이, 고자질쟁이!”

30대 후반인 아빠는 매우 부끄러워서 엄마를 찾을 수 없었다.



# 소망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매우 걱정되는 변수 한 가지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착한 일도 많이 했지만 울기도 많이 울었잖아. 선물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당황할 줄 알았던 너는 꽤 침착하게 자기변호를 시작했다.

“내가 바라는 게 그렇게 큰 게 아니거든. 내년에 자전거 보조바퀴 떼고 타는 거 연습할 건데 다치면 안 돼서 말이야. 그래서 보호장비 정도….”

그 정도면 참 소박하다. 그 보호장비 어제 택배로 도착더라.



# 유머 코드

자동세차를 하는데 뒷자리에 틈이 있었는지 물이 조금 엄마에게 튀었다. 순간 상황을 묘사하는 네 농담은 재치 있었다.

“차도 씻고 엄마도 씻었네.”

엄마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차도 씻고 엄마도 씻었네.”

혹시 엄마가 듣지 못했을까 봐 목소리에 힘을 더 준 듯했다. 여전히 엄마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차도 씻고… 엄마, 내 얘기 들었어?”

세 번이나 같은 말을 해도 반응 없는 엄마가 아빠도 답답했다.

“어, 들었어.”
“그런데 왜 안 웃어? 차도 씻고 엄마도 씻었다는 게 안 웃겨?”

그러게 말이다. 가끔 네 엄마와 유머 코드가 맞지 않아 힘들 때가 있다. 그리고 아빠는 솔직히 많이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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