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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to ye-ji

2016년 열 살

# 라면

냉장고 채소를 모두 동원했다. 살릴 것은 살리고 버릴 것은 버렸다. 끓는 물에 아낌없이 무를 넣었다. 한참 끓이다 양파와 애호박도 넣었다. 깊은 맛이 눈에 보이고 코를 찌르더구나. 낮잠을 자다가 깬 네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국물을 살짝 맛보더니 환한 표정에 콧소리까지 섞어 한마디 하더구나.

"아빠, 국물이 진짜 깊고 맛있어요."

'엄지 척'은 보너스니? 네 감상이 깊고 맛깔나구나. 아빠가 만든 라면이 다 그렇단다.



# 감기

열이 갑자기 38도를 넘어 깜짝 놀랐다. 어쩐지 상태가 좀 그렇다 싶더니. 병원에 가는데 영 힘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든 힘을 좀 주고 싶었다.

"예지, 아프니까 공부나 방학숙제는 못 하겠네. 혹시 할 수 있겠어?"
"아빠, 전에 항상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고 했잖아."

그래, 방학숙제 하자는 말은 아니었다. 역시 푹 쉬는 게 좋겠구나.



# 춤보다 노래

일하는 아빠 옆에서 잔잔하게 부르는 노래가 참 듣기 좋다.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가 많이 나오는 것을 보니 좋은 노래겠지. 음이탈이 잦은데다 어색한 음정, 불안한 박자가 마음에 좀 걸렸다.

"엄마, 나는 춤보다 노래가 더 나은 것 같아요."

네 노래에 대해 하고 싶었던 말을 꾹 참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어쨌든 네 예능을 응원한다.



# 방학

네 방학은 늘 부럽다. 일하는 아빠에게 슬쩍 다가와서 이런 질문을 할 때면 더.

"아빠, 나 방학인데 아빠는 무슨 계획 없어?"
"아빠? 아빠 계획은 열심히 취재하고 글 쓰는 거지 뭐."

답답했니? 호흡을 가다듬은 너는 천천히 다시 말했다.

"아빠 계획은 그렇고, 예를 들면 방학 동안 가족이 여행을 떠난다거나."

엄마가 그러던데 '예를 들면'은 아빠가 너에게 자주 하는 말이라더라. 네가 관심 있는 그 계획은 엄마가 고민 중이다. 아빠가 네 말길을 못 알아들은 게 아니다.



# 분담

엄마·아빠가 휴대전화로 게임하는 모습이 닮았다고 지적했잖아. 네 엄마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예지도 게임하면 똑같다며 반격하더구나.

"엄마는 꼭…"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너를 정의로운(?) 아빠로서 돕지 않을 수 없었다.

"걸고넘어지지?"

까르르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뿌듯했다.

"엄마가 아빠도 꼭 걸고넘어지거든. 예지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왜?"
"백지장도 맞들면 낫잖아."

순간 환하게 웃던 네가 돌연 얼굴을 싹 바꿨다.

"뭐 그런 걸 나눠 들어?"



# 서술형 문제

"아빠, 유치원 때 수학 서술형 문제는 참 좋았는데."
"어땠는데?"
"남자 셋, 여자 두 명이 있습니다. 모두 몇 명일까요?"

정말 좋은 문제구나! 아빠 마음에도 쏙 든다.



# 자신 있으면?

느닷없이 아빠 장점이 뭐냐고 물어서 당황했다. 다 말해도 되겠니?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하시던지요."

'하시던지요'라니, 차마 한 개도 말할 수 없었다.

"왜 안 해요?"
"장점이 있지만 말하지 않는 것을 겸손이라고 하거든."
"풉!"

이제 대놓고 비웃을 줄도 아는구나.



# 수평

아까부터 엄마가 찍은 사진을 보며 감탄하는 이유가 있다.

일단 제주에서 마주친 설경이 부산에서 보기 힘들어서는 아니다. 아빠에게 달라붙은 네 모습이 반가운 것은 사실이지만 사진에 감탄할 정도는 아니지. 자애롭고 꼼꼼하며 대인의 풍모가 물씬 풍기는데다 딸을 번쩍 안아 올리는 아빠조차 이 사진에서 주인공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포인트는 네 엄마가 수평을 맞췄다는 것이다. 드디어!



# 여자 마음

장난을 받아주지 않는 너에게 아빠가 밉냐고 물었다.

"아빠는 여자 마음을 몰라."

몰라? 이 말이 비수로 꽂히더구나. 10년 동안 가까스로 엄마 마음을 짐작하게 됐다 싶었더니 이제 네가 여자가 됐구나. 물론 대한민국에서 10대 초띵이면 여론 주도층이기는 하다만.



# 재회

사촌 언니들과 놀겠다며 외할머니집에서 하루 묵은 너를 보자마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그런데 왜 전화 안 했어."
"배터리가 떨어져서. 아빠는?"
"어, 너 노는 거 방해할까봐."

슬쩍 웃는 표정이 불안하더라.

"아빠."
"응?"
"그럴 듯한데."

표가 많이 났니?



# 작명

아빠 어릴 때 개 네 마리를 키우는 이웃이 있었어. 개들 이름이 뭔지 아니? 달타냥, 아토스, 포르토스, 아라미스였다. 무려 30여 년 전이다. 개 이름이라고 해봤자 쫑, 메리 정도. 기껏 신경 좀 쓴다는 집에서 고작 '점프'였다. 그런데 <삼총사> 주인공이라니!

지난해 인생 설계에 전혀 없던 고양이를 너 때문에 들이면서 작명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그 고양이가 수컷 '러시안블루'라는 것을 알고 당장 떠오르는 이름이 있더구나. 그래, 효도르. 러시아 출신 이종격투기 선수. 한때 60억 분의 1 사나이로 불리던 그. 멋있지 않니? 아울러 레닌, 트로이츠기, 차이코프스키 같은 이름도 끌리더라.

"아빠, 하늘이로 할게요."
"오! 이름 예쁘네, 잘 어울리는데."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차마 진심을 밝힐 수 없었다.



# 상장

한 학년을 마무리하며 받아오는 상장이 많더구나. 시험 점수도 아주 훌륭하고 말이다. 배시시 웃으면서 대단한 게 아닌 것처럼 말하는 네 모습이 예뻤다. 혼을 담아 리액션을 펼치는 엄마와 달리 그냥 잘했다며 담담한 모습을 보인 아빠가 약간 섭섭했니?

사실 리액션 부문만 따진다면 엄마보다 아빠가 몇십 배 낫다. 엄마가 대종상 정도라면 아빠는 오스카 수준이지. 하지만, 너무 오버하면 네가 기대만큼 못했을 때 애써 담담하게 대처했던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저렇게 기뻐 날뛰는 것을 보니 전에 괜찮다고 했던 것은 거짓말이었구나 생각하면 안 되잖아. 어쨌든 기쁜 마음은 이렇게라도 남겨두마. 고생했다.



# 퀴즈

선생님이 프린트해 준 문양에 색칠을 했다며 보여주는 알록달록한 그림이 참 예쁘고 신기했다. 슬쩍 그림을 보여주던 너는 다시 그림을 감추며 묻더구나.

"아빠, 내가 무슨 색을 제일 적게 썼게?"
"글쎄."
"보기 불러 줄게.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갈색, 하늘색, 검정색."
"갈색?"
"아니, 많이 썼는데."
"모르겠네."
"하얀색. 문양을 색칠하면서 하얀색을 쓸 필요가 없었거든."

그렇구나. 그런데, 하얀색은 왜 보기에서 뺐니?



# 직업

"아빠, 친구들한테 우리 아빠 신문기자라고 말하니까요…"

잠깐! 순간 많은 생각이 스칠 수밖에 없었단다. 욕 많이 먹는 일이거든. 게다가 아빠는 자질이 부족한 쪽이다.

"부럽대요."

그래, 다행이네. 그리고 고맙네. 진짜로.



# 딴말

외숙모 딸 대학 합격기를 한참 듣던 네가 자그맣게 얘기했다.

"아빠, 난 엄마와 아빠가 실망하지 않는 대학 갈 거에요."

실망이라. 네가 계단에서 굴러 입원했을 때 수없이 다짐했던 게 있다. 존재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며 살겠다고.

"아빠는 예지가 아무 대학이나 가도 돼. 대학 못 가도 상관 없어. 실망 같은 거 안해."
"진짜?"
"응."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

처음 한 말은 진심이었니? 아빠는 몰라도 엄마는 만만찮을 것이다.



# 속셈

"예지, 생일 축하해."
"어? 아빠,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니까 말이다. 아빠가 무슨 딴살림을 차린 것도 아니고, 슬하에 자녀가 10명쯤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너밖에 없는데 기억 못할 이유가 없잖니.

"저도 잘 몰랐는데."

발그레 달아오른 뺨을 보며 이미 알아챘단다. 잘 모르기는커녕 3월 중 너에게 의미 있는 날은 생일뿐이라는 거. 그래서 결코 축하 인사 따위로 만족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아빠, 난 생일이 학기 초라서 친구를 잘 초대하지 못했는데…"

그래, 이제 슬슬 시작이니?



# 알파고

지난 1월 제주도 갔을 때 호텔 복도에서 마주친 아저씨 기억나니? 아빠가 엄청 반가워했잖아. 그러나 정작 그 아저씨는 쑥스러워 했지.

"아빠랑 엄청 친한 사람인 줄 알았어."

그 아저씨 이름이 이세돌이란다. 최근 1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사람. 오늘 인공지능과 바둑을 뒀는데 졌네. 이런 일이 아빠 사는 동안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당황했다. 바둑 따위는 관심조차 없는 네가 한참 자랐을 때나 가능할까 싶었는데 좀 먹먹하네.



# 그때는

네 아기 때 얘기를 하던 엄마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휴대전화에 저장한 동영상을 틀더구나. 5~6살즈음 네 공연이 무척 반가웠다. 함께 보던 너도 아주 재밌어했지.

"아빠, 귀여워요."

그렇겠지 뭐. 엄마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벌레 하더라. 눈은 초승달을 만든 채 입을 다물지 못하더구나. 그나저나 동영상을 보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 엄마에게 물었다.

"예지 발음이 동영상보다 훨씬 정확하지 않았나?"

엄마가 꺽꺽 넘어가면서 말하더구나.

"그러게. 전에는 귀에 쏙쏙 들어왔는데."



# 직언

엄마가 야심차게 준비한 김무침이 좀 짰다. 웬만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엄마도 부정하지 않더라. 그래도 첫 시도니 너그럽게 먹자꾸나. 이럴 때 한 번 참아야 일상이 편한 법이다. 더군다나 첫 시도라잖아?

"엄마, 레시피 대로 안 했어?"
"했어. 간장을 조금 많이 넣었나 봐."
"티스푼으로 한 스푼? 두 스푼?"
"아니, 그냥 감으로 했어."

여기서 끝났으면 무난하겠다고 생각했다.

"TV에서 쉐프들도 감으로 양념을 넣던데, 맛있던데."

한마디 박아놓더구나. 엄마가 요리를 못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전제는 꽤 훌륭한 감각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 직언에 청량감을 느꼈다.



# 어부지리

집에 마땅히 먹을 게 없더구나. 밥상을 차릴 여력도 없고. 배달 음식을 뒤적였지. 그나저나 너와 먹을 수 있는 배달 음식이라고 해야 피자 아니면 치킨이구나.

"아빠, 피자나 치킨 말고 다른 거 뭐 없을까?"

그러게 말이다. 배달 목록을 뒤져 보니 횟집 전화번호가 있네. 네 의사를 묻기는 했다만 별로 기대는 없었단다. 그런데 '엄지 척'이라니.

"아빠, 괜히 나 때문에 회 시키는 거 아냐?"
"아니, 예지 먹고 싶으면 아빠는 아무 거나 괜찮아."

그리고 '너 때문에 괜히'라면 '중(中)'을 시키지 않았겠지. 마침 도수 높은 고급 증류 소주도 남았고 말이다.



# 투쟁

금요일 야근, 토요일 휴일근로가 예정된 엄마 일정을 확인한 네가 일갈하더구나.

"아빠, 아무리 생각해도 휴일에 회사 가는 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옳다! 노동자 권리에 예민해서 참 기특하다. 당장 너와 함께 엄마 회사 앞에서 가족을 돌려달라는 투쟁을 전개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원히 돌려줄까 봐 참았다.



# 부재

"엄마, 엄마도 아빠가 집에 안 들어오는 날에 보고싶어요?"

 

그런 돌직구를 밥상 앞에서 느닷없이 던지면 아빠가 힘들단다.

"당연히 보고싶지. 예지는?"
"나도. 나 아빠 보고 싶어서 운 적도 있잖아."

일단 한숨 돌리고, 그나저나 아빠 보고 싶어서 운 적도 있다고? 엄마 없을 때만 우는 줄 알았더니.

"예지, 아빠 보고 싶어서 운 적이 있다고?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아빠 없을 때니까요."

그러게 말이다.



# 어른들 세계

"아빠, 오늘 엄마 생일인데 알아? 난 카드 썼어."
"아빠는 카드 같은 거 안 써."
"왜?"

백화점 상품권을 받은 엄마 표정 봤니? 어른들 세계가 좀 그렇다.



# 삼행시

엄마 탄신일을 맞아 외식을 하는 자리에서 수줍게 카드를 내미는 모습이 참 예뻤다. 선물은 잘 모르겠지만 카드는 꼭 써 드리고 싶었다는 표현에서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도 역시 돋보이는 것은 엄마 이름으로 지은 삼행시였다.

정 : 정말 정말 사랑하는 우리 엄마
순 : 순간 순간이 행복해요
영 : 영원히 사랑해요

엄마는 마치 이 순간 때문에 40여년 동안 이 이름을 쓴 사람처럼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더구나. 물론 아빠는 '상품권과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콤보'가 네 말빨에 나가 떨어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만.



# 훈련

네가 없었다면 말도 되지 않는 억지를 끝까지 들어야 할 인내도 필요 없었다. 아빠 얘기를 여린 네가 잘못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 번, 세 번 조심할 이유도 없고. 늘 공감이 부족한 지점이 없지 않나 반성할 일도 없었지.

엄마는 아빠를, 한 사람을 10년 동안 이렇게 훈련시킬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더라. 나이는 상관없고 애를 키워봐야 어른이라는 어르신들 말, 전혀 근거 없지는 않더라.



# 아빠 닮았네

잠꾸러기 엄마는 네 먹일 김밥 싸느라 새벽 5시에 일어나더구나. 평소 그 시간에 아빠가 수면을 조금이라도 방해했다면? 됐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너는 엄마에게 배시시 웃으며 설렌다고 했다면서. 엄마는 자기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해도 그렇게 표현하지 못했다며 너무 예뻤다네. 고슴도치!

그나저나 엄마 말이 맞다면 네 감수성과 표현력은 아빠 덕이구나.



# 확인 또 확인

"아빠, 어떤 친구들은 선생님이 지나가는데 뒤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가는데, 나는 '선생님' 부르고 선생님이 나를 보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해."

참 잘하는구나. 아빠 회사에서는 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사를 했다는 후배와 인사를 받지 않았다는 선배들이 티격태격하거든. 신기하지? 그런데 어른들은 그걸 또 팍팍한 일상에서 작은 재미라고 생각해. 이해하기 어렵지?



# 유통기한

냉장고에 있는 플라스틱 우유병을 보니 희미한 글씨가 적혀 있더구나. 볼펜으로 꾹 눌러썼네. 쉽지 않았을 텐데.

'유통기한이 지났습니다. 이예지'.

3일 지났구나. 엄마·아빠가 모르고 마실까 봐 불안했니?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고 고마웠다. 아빠는 남은 우유를 마저 마셨어. 3일 지났으니 마신 게 아니라 분리배출인가? 네가 좋아하는 떠먹는 요구르트도 아빠는 날짜 지난 것만 먹거든.

"아빠, 날짜 지난 거 왜 먹어?"
"지구를 위해서."

지구를 위한 게 또 너를 위한 거지 뭐.



# 금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보던 너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외쳤지.

"가위, 바위, 보!"

아빠는 바위, 너는 보였다.

"예지, 저거 안 보여?"

아빠가 엘리베이터 문에 붙어 있는 '보 금지' 스티커를 가리켰잖아. 피식 웃던 너는 이렇게 말하더구나.

"아빠는 그러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왜 쓸데없이 가위바위보야?"

아주 조금 부끄러웠다.



# 편지

어버이날을 맞아 엄마·아빠에게 보낸 편지에 '항상 도와줘서 고맙다'는 대목이 와 닿았다. 하지만 '그만큼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은 목에 걸린 가시 같더구나.

"여행 가면 짐도 들고, 엄마·아빠 도와주기도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고, 이제 예지는 짐이 아니라 우리집에서 중요한 전력이야."

배시시 웃는 얼굴에서 아빠 대응이 얼마나 적확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예지, 너는 존재 자체가 행복이고 큰 도움이야. 예지가 없었다면 엄마와 아빠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그만한 도움이 어딨어?"

활짝 웃는 네 얼굴에서 엄마가 이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단다.



# 체육회

소체육회를 한다며? 무슨 운동회 같은 거니? 전에 소풍 갈 때도 물었지만 한 번 더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이예지, 1번!"
"1번? 아! 안전."
"2번!"
"2번도 안전!"
"3번!"
"재미!"

그래, 아빠는 주입식 교육이 마냥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 자전거

한동안 중심잡는 것조차 버거운 모습이 안쓰러웠다. 넘어지지 않고 출발은 된다 싶더니 곧 비틀거리면서도 꽤 먼 거리까지 페달을 밟더구나.

"핸들을 틀면 비틀거려. 가고 싶은 쪽으로 몸을 조금만 기울이면 돼."
 
아파트 작은 광장을 몇 바퀴 도는 네 표정이 참 벅차 보였다. 동그란 이마는 유난히 반짝였고, 뒤로 흩날리는 머리칼은 보는 것만으로 후련했다. 아빠 앞을 지나며 금세 작아지는 네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봤다. 너는 그렇게 자라며 멀어지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더 큰 세상으로 나가면서 멀어지고 또 자랄 것이다. 응원한다.



# 착취

아빠가 만든 음식이 너무 맛있다며? 엄마 음식 솜씨는 최고이고. 외할머니가 모처럼 집에 와서 밥을 차려 주니 또 이렇게 말했다면서?

"할머니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 입맛이 돌아요."

그러니까 아빠는 네가 사람을 참 잘 부려먹는다는 생각이 갑자기 스쳤다.



# 딸바보

간만에 농담을 주고받다가 말문이 막히니 아빠에게 한다는 소리가 뭐? 딸바보!

"딸바보라니 그게 뭔데?"
"딸밖에 모르잖아!"
"아니거든, 아빠는 예지보다 엄마가 우선이거든!"

당황했니? 너도 쉽게 물러서지 않더구나.

"칫, 부끄러워하기는."



# 농담과 진담

밥을 먹는 너를 빤히 쳐다보는 이유가 궁금했니?

 
"왜 자꾸 봐?"
"응? 너무 못나서."
"풉, 아빠가 더 못났거든요."

잘 안다. 아빠는 농담을 하는데 너는 진담을 하더구나. 언제든 필요할 때면 진실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 흔적

차 뒷좌석 시트 사이에 양말을 꽂아뒀구나. 운전석 아래 굴러다니는 음료수 컵이 보이고. 조수석 뒤 주머니는 쓰고 버린 휴지로 불룩했다. 작은 차 뒷좌석이 좁다고 여기기 시작했는지 항상 옆에 태워야 했던 엄마를 조수석으로 방출한 게 여섯 살 때였나? 뒷좌석에 벌러덩 누워 잠이 든 너를 보며 엄마는 또 괜히 뿌듯해했단다. 청소는 언제나 귀찮은 일이지만 등지고 있느라 볼 수 없던 네 흔적을 보는 재미는 쏠쏠했다.



# 금수저

아이폰5s 액정을 박살냈구나. 놀다가 그랬다니 뭐라할 수도 없고. AS센터에서 견적을 내니 10만 원이더라.

"아빠, 100만 원 넘게 나오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

호방한 계산이 엄마를 닮았구나. 그 기상 하나는 금수저다.



# 이 소리는?

오! 오! 오!

이 소리는 지난달에 쓰고 남은 '알'이 이번 달에 합산돼 더 여유 있게 휴대전화 데이터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문자로 확인한 네 입에서 나온 탄성이더구나. 몇달 전만 해도 알이 부족해 늘 허덕이더니 좋겠다. 무엇보다 동영상 감상을 줄이겠다던 약속을 남은 알로 확인할 수 있어 흐뭇했다. 혹시 알 떨어지면 얘기해라. 엄마에게 함께 부탁해보자.



# 아빠 역할

"예지가 요즘 자기를 좀 무서워하는 것 같아."

엄마가 조용히 아빠를 부르더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를 하더구나. 무섭다니, 무섭다니! 가끔 네 무리한 행동을 나무랐지만 충분히 감성 성장 수준을 고려해 조심스럽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평소 네 기분 맞추는 거에 비하면 '새발의 피의 피피피' 아닌가.

"뭐라하는 것은 내가 할 테니 자기는 될 수 있으면 좋게만 대해줬으면 좋겠어."

억울한 것과는 따로 갑자기 짠한 생각도 들었다. 사실 강철 심장, 무쇠 멘탈 네 엄마는 태어나기 전에 아빠가 돌아가셨거든. 그래, 네 외할아버지. 갑자기 엄마 얘기를 들으면서 너에게 좋은 아빠가 되는 것과 네 엄마가 그리는 좋은 아빠가 된다는 것을 함께 생각하게 됐다. 어렵구나.



# 엄살

폭 안기면서 머리로 아빠 배를 콩콩 박았잖아. 바닥으로 쓰러지며 배를 움켜잡고 뒹구는 아빠 연기 봤지? 영화의 도시 부산에 사는 아빠답지 않니? 그나저나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너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며 야무지게 말하더구나.

"일어섯!"

우리가 너를 그렇게 키웠나? 순간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 삼지창

친구 중에 지우, 지후와 유난히 친하다면서? 셋 모두 이름에 '지'가 들어가더구나. 그래서 고민 끝에 너희 셋을 묶어서 부를 수 있는 별명을 생각해냈다.

'삼지창'.

이 기발한 작명을 너에게 문자로 보냈지. 너는 '아빠, 우리 셋을 묶어서 그렇게 재밌고 기발한 별명을 지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삼지창 이미지가 우리가 쓰기에는 좀 공격적이고 불편하네요. 그래도 재밌어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이렇게 짧게 답장을 보냈더구나.

'우쒸! ㅋㅋ'

너무 짧아서 아쉬웠지만, 네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 부상

놀다가 새끼손가락을 접질렀구나. 그 소식을 전한 엄마는 목소리부터 아팠단다. 붕대로 감은 손가락이 참 짠하더라. 머리보다 허리보다 팔보다 다리보다 무릎보다 가슴보다 엄지보다 검지보다 중지보다 약지보다 무엇보다 그나마 새끼손가락이라서 다행이다만. 안 다치고 자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다치지 않았으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지, 손가락 많이 아팠겠다."
"응."
"엄마, 아빠 마음은 더 아픈 거 알지?"
"헤~."



# 추적

아침에 휴대폰을 한참 찾더구나. 전화를 걸었는데 벨소리도 들리지 않고, 너는 좀처럼 어디에 뒀는지 기억을 못하네. 분명히 학원에서 집에 올 때도 갖고 있었다면서 생각은 안 난다니.

"폰 집에 들고 온 것은 어떻게 기억이 나?"
"분명히 들고 왔어."

얼굴에서 진심이 엿보였다. 아빠가 또 능력을 발휘해야지 뭐.

"예지, 잘 생각해 봐. 너는 분명히 가방을 메고 있었을 거야. 왼손은 손가락을 다쳐 깁스를 했으니 휴대폰은 분명히 오른손에 들었을 거야. 그러면 집에 들어올 때 어떻게 들어왔어? 비밀번호 누를 손이 없는데?"

잠시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현관 쪽으로 뛰더구나. 현관 문을 열자 복도 창틀에는 무심한 주인 덕에 외박할 수밖에 없었던 휴대폰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휴대폰을 집어들며 아빠를 향해 보내는 밝은 미소와 존경을 담은 눈빛도 확인했다. 아빠 회사에는 이런 말이 있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얻는다."

멋있지?



# 인과관계

휴대폰 화면 보호판이 또 깨졌더구나. 그래, 또! 이번에는 진짜 화면 차례인데, 아빠가 기억하는 것만도 보호판-액정-보호판-액정-보호판… 다섯 번이구나. 그 사이 수리는 두 번 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때는 이유를 알아야 하지 않겠니?

"예지, 이렇게 자꾸 깨지는 이유가 뭘까?"
"응, 그냥 떨어뜨렸을 때는 괜찮은데 내가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다가 친구와 부딪히거나 놀다가 넘어지면서 휴대폰을 든 손으로 땅을 짚을 때 깨져. 그래서 휴대폰을 안 쓸 때는 가방에 넣어두려고."
 
인과관계가 아주 뚜렷하고 문제 인식은 물론 해결책까지 명확하게 제시하는 게 참 기특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참 얄미울 때도 있더라.



# 날개

"아빠, 저도 친구들처럼 인터넷에 동영상 올리고 싶어요."

벌써 그럴 때가 됐구나. 낯가림 심하고 엄마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던 껌딱지가 이제 스스로 드러내고 싶은 욕구를 말하는구나. 하지만, 먼저 동영상을 올리면 친구는 물론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이든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어야 해. 너를 좋다는 사람도 많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비웃고 욕하고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걸 견뎌야 하는데, 아빠는 네가 동영상 올리고 사람들 얘기에 기분 좋다가 울적하다가 그러느니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훨씬 재밌는 것을 찾았으면 좋겠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재밌는 게 너무나 많을 때잖아. 안 그런가? 사실 이런 아빠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좁디좁은 생각으로 그저 네 날개를 붙드는 게 아닌가 걱정이다.

"더 재밌는 거? 자전거? 여행? 어쨌든 아직은 다른 사람이 나쁜 얘기 하면 힘들 것 같아. 나중에 하지 뭐."

언젠가 어깻죽지가 가려워 못 견디겠거든 아빠에게 묻지 말고 힘차게 날아오르려무나.



# 롤러코스터

너를 옆에 태우고 가다 보니 지하차도가 보이더구나. 차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영화의 도시' 부산에 사는 아빠답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너도 지지 않고 '영화의 도시'에 사는 딸답게 내리막길이 끝날 때까지 비명을 지르더구나. 지문도 없는데 자연스럽게 두팔까지 높이 드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우리 평범한 소형차는 3초 정도 롤러코스터가 됐지.

"예지, 롤러코스터 타 봤어?"
"아니, 키가 안 돼서 아직. 다음에 가면 타려고."

좋다, 한 번 타러 가자!



# 회복

수화기 너머로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간드러지고 행복에 겨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부탁할 때도 그런 목소리를 내지 않잖아. 게다가 아빠는 토론회 취재 중이었거든. 바로 옆에 앉은 한 아주머니가 휴대전화 밖으로 삐져나온 네 목소리를 듣더니 배시시 웃더구나.

"붕대 풀었어요."
"그래? 좋겠네."
"으흥흥흥흥."

손가락을 접질러 3주 남짓 깁스를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드디어 붕대 해제(?)를 선언했구나. 그런 목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구속은 그렇게 괴롭고 자유는 그만큼 달콤하단다. 그나저나 손에서 발냄새(?)가 나기 시작했는데 이제 씻을 수 있어서 또 다행이다. 앞으로 조심하자.



# 장난

화장실을 다녀온 너는 앞에서 기다리던 아빠를 향해 껑충껑충 뛰며 다가오더구나. 낯선 공중화장실 입구에서 기다렸으니 고마웠겠지. 세 걸음 정도 거리가 되자 폴짝 뛴 너는 공중에서 아빠 얼굴을 향해 손을 쫙 펴더라. 꽤 우아한 연결 동작이었다. 얼굴 전체에 타다닥 부딪히는 물방울만 아니었다면 훨씬 더 감탄했을 거야. 도대체 그런 장난은 어디서 배우니?



# 실수

문방구 앞에서 언제까지 만나자며 재잘재잘 통화하는 모습이 예뻤다. 단짝 친구라는 게 참 좋지? 학교까지 5분이면 가는데도 2분 30초를 함께 걸어야 하니 말이다. 언제 나오냐고 묻던 너는 갑자기 두리번거리면서 방 이쪽저쪽을 뒤지더구나. 엄마와 아빠는 표정으로 뭘 찾느냐고 물었지.

뭐? 전화기 찾는다고? 너 지금 통화하고 있잖아!

민망함을 감추려는 큰 웃음이 어색했다. 도망치듯 학교로 출발하더구나. 덕분에 또 웃었다.



# 피구

반 대항 피구 대회가 한창이라면서? 첫날 경기 장면을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했는지 엄마에게 전해 들었는데도 동영상을 보는 것 같더라.

"엄마, 그런데 1반 애들 진짜 못해."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평소 하지 않던 핀잔까지. 그런데 둘째 날부터는 피구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면서? 결과를 이미 예측한 엄마가 넌지시 물었더니 낯선 피구 규칙을 늘어놓으며 서럽게 심판 선생님 얘기만 한참 했다고. 많이 억울했구나. 그나저나 엄마와 아빠는 20세기 국민학생이고 너는 21세기 초등학생인데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 공감

공감 얼마 전 엄마 회사에서 네가 깔짝깔짝 세월호와 리본을 그려 엄마 자리에 꽂아 놓았다며? 아빠는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은 물론 잘 모르는 네 매력까지도 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네 매력은 나 아닌 다른 것에 공감하는 능력이다.



# 이혼

나쁜 꿈을 꿨다며? 하루종일 표정이 어둡구나. 엄마와 아빠가 꿈에서 이혼을 했다고? 네 문제로 다툼이 좀 있었고. 그나저나 새 엄마 같은 사람도 봤다면서!

"그래, 꿈에서 힘들었겠구나. 새 엄마는 예뻤어?"
"아니, 엄마보다 훨씬 안 예뻤어."

그래? 훨씬 예쁘지 않았단 말이지.

"예지, 아빠 이혼하는 일은 없을 거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다부진 네 표정을 보며 새 엄마 미모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 액션

마트에서 무빙워크를 타고 내려오다 아빠가 자동차 열쇠를 떨어뜨렸잖아. 손잡이 바깥쪽으로. 다행히 더 아래층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지. 3층에 도착하자 열쇠와 아빠를 번갈아 보며 당황하던 네 표정이 순간 웃겼다. 5m 정도를 거꾸로 뛰어 올라간 아빠는 다시 내려오면서 차키 근처에 이르자 상체를 숙여 손잡이 너머 키를 낚아챘지. 영화 같은 장면 아니었니? 이를테면 절벽에서 떨어지는 여자 주인공을 헬기에서 낚아채는 남자 주인공 같은 모습 말이다.

"오! 아빠, 전에도 그런 적 있었어?"
"아니, 처음인데."
"와! 대박!"

대박? 아빠는 네 표정과 표현이 대박이었다.



# 친절

아빠가 간혹 밥을 먹으면서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을 던지잖아. 그래야 좋은 아빠라네. 좋은 아빠와 살고 싶다면 네가 참아라. 그나저나 외국인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었을 때 늘 그렇듯 대단한 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친절과 소통하려는 노력요."

물론 이 정도 답도 더 바랄 것 없이 감탄스러웠어. 그래도 친절이 소통하려는 노력보다 앞인 이유는 궁금했지.

"소통을 한다고 해서 기분이 좋을 수는 없잖아. 서로 기분이 좋으려면 친절해야할 것 같아."

진짜 나이스다!



# 고음

요즘 노래 연습이 한창이더구나. 누덕누덕 스타카토? 아빠 눈에는 네가 뭘 해도 예쁘다만 그렇다고 노래에 재능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그런데 이 노래는 애초에 키가 높더구나. 초반부터 네가 가성을 남발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게다가 클라이막스는 가수조차 가성을 남발하는 고음 부분인데, 가성에 또 가성이라. 힘들었지? 아빠도.

"아빠, 노래 괜찮았어?"

수줍게 묻는 네게 대놓고 진심을 말할 수 없었다.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 거짓을 정당하다.

"노래 재밌네. 잘 불렀어!"
"히히, 고음 부분에서 살짝 갈라졌는데."

고음은 물론 초반부터 음 이탈은 꾸준했다. 그래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너를 향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작은 증거지.



# 여유

"난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
"아빠는?"
"두 번째."
"외할머니는?"
"외할머니는 순위에 없어. 우리 가족만 순위 매기는데."
"그러면 아빠가 꼴찌인가?"
"응."

옆에서 얘기를 듣던 엄마가 식구 세 명에 무슨 순위냐며 비웃더구나. '1등의 여유'라고 생각한다.



# 선빵

"아빠, 미안해요."

전화기 너머 울먹이는 목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 휴대전화 액정이 또 깨졌다고. 네 번째인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미안할 게 아니다. 폰은 고치면 되지. 그동안 마인크래프트 못해서 섭섭하겠네."
"아니에요. 헤에~."

전화를 끊고 나서 알았다. 미안은 무슨! 그저 '선빵'이었을 뿐이구나. 그 수법이 어쩐지 익숙하여 차마 뭐라 할 수 없었다.



# 팥빙수

학원 가기 직전 빵집 앞에서 샌드위치와 팥빙수를 먹으니 어땠니? 길만 건너면 되는 학원에 갈 시간이 다 됐다면서 자꾸 시간을 묻길래 다음 신호에 건너면 되겠다고 했지. 팥빙수는 절반 정도 남았고.

"아빠, 있잖아. 나 사실 학원 조금 늦어도 돼."

네 번째 신호가 바뀔 때 마지막 얼음덩어리를 한 번에 들이킨 네 표정이 좀 안쓰러웠다. 좋은데 입 얼얼하고 머리 깨지는 표정 말이다. 맛있었니?



# 표정

엄마가 네 표정을 담은 사진으로 '이모티콘을 만들었다'며 보여줬어. 엄마 스마트폰 속 너는 졸지에 웃고 찡그리고 울고 성내는 이모티콘이 돼 있더구나. 네 자라는 모습을 보며 표정이 참 다양한 아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는데, 그런 것 같아서 흐뭇했다.



# 영화 감상

영화 <7번 방의 선물>보고 한없이 펑펑 울더구나. 네 감수성 그런 거는 잘 모르겠고, 역시 아빠와 딸 이야기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엄마가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보고 펑펑 우는 너를 달래며 어쩐지 뿌듯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뒤늦게 짐작할 수 있었다.



# 수면

침대에서 엄마와 나란히 자는 모습이 보기 좋더구나. 한쪽 다리를 접고 자는 모습이나, 피곤하면 입을 반쯤 벌리고 자는 게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침대를 반으로 접어서 찍으면 딱 겹치겠다 싶더라. 그나저나 아빠 자리에서 언제 비킬 테냐? 멀쩡한 침대와 아내를 두고 바닥에서 잘 수밖에 없는 게 무더위 때문이라면 여름이 싫은 이유를 추가할 수밖에 없단다.

 

# 용돈

급할 때 쓰라고 1만 원을 줬다. 아빠는 쪼잔하게 뭘 해야 용돈 주고 그런 거 없다. 알지? 사랑에는 조건이 없거든.

"예지, 만 원 다 썼어? 용돈 필요하지 않아?"
"어, 조금 남았어."

씻으러 들어가는 아빠를 굳이 다시 부르더구나. 어쩐지 대화가 부족했다는 느낌은 받았다.

"아빠, 2000원 치 빵 사서 할머니 드렸어."
"아이고, 할머니가 좋아했겠네. 참 잘했구나."
"할머니가 맛있다고 하셨어."

배시시 웃는 모습이 예뻤지만, 나머지 8000원은 어디에 썼는지도 궁금했다.



# 고슴도치

5㎏이 넘는 고양이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려면 안고 갈 사람이 엄마뿐이구나. 너는 힘이 딸리고 아빠는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잖아. 길에서 유모차에 탄 아이가 엄마 품에 있는 하늘이를 보고 혀짧은 소리로 부르네.

"호랑이."

엄마는 그것도 자식(?) 칭찬인가 싶어 헤벌레 하더구나.

"고양이 보고 호랑이라니까 좋나?"
"흐흐, 좋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너를 보는 엄마 표정은 늘 그랬단다. 헤벌레, 헤벌레.



# 보글보글

컴퓨터와 40인치 TV를 연결해 너와 '보글보글' 2인용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이런 게 '과학기술의 진보'가 아니라면 뭐가 과학이고 문명인가 싶단다. 헤벌레 하는 네 표정에서 이 게임이 고전이며 명작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네 엄마는 왜 가만있는 딸에게 느닷없이 오락 따위를 가르치느냐고 발끈하더구나. 아무리 네 엄마가 우리 집 끝판왕이지만 말은 바로 해야겠다.

먼저 이 오락은 예전에 네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미 전수했다. '새삼 느닷없이' 가르친 게 아니지. 게다가 이 게임은 과거 연애 시절 네 엄마에게 전수한 것이기도 하다. 그때 둘이서 노트북 앞에 앉아 마지막 100번째 라운드를 성공해내며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확인했지. 여러 정황으로 미뤄 보건대 엄마가 자기만 빠져서 삐진 것 같아.



# 가창력

어린이 합창단이 부른 <거위의 꿈>을 듣고 있더구나. 아빠도 참 좋아하는 노래다. 나즈막히 흥얼거리며 따라부르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

"아빠, 나도 노래 잘 부르고 싶어."
"왜? 노래 부르는 게 잘 안 돼?"
"응, 다른 거는 괜찮은데 음정을 맞춘다거나 음이 높게 올라가면 부르기 어려워."

그 정도면 거의 다 안 되는 거 아니냐?



# 끝말잇기

아빠가 술김에 영어로 끝말잇기를 하자고 했잖아. 사실 금방 끝날 줄 알았다. 아빠 영어 실력은 정말 하찮거든. 그런데, 뜻밖에도 오래가더구나. 서로 발음이 낯선 것은 분명했어. 아빠는 네 굴리는 발음이 도통 뭔지 모르겠고, 너는 또박또박(?)한 아빠 발음을 알아듣지 못하더라. 그래도 마지막 스펠링만 알면 끝말이야 이어지는 것이니 뭐.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자 일단 휴전하기로 한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아무래도 아빠 저력은 '주입식 교육'에서 나온 듯하다.



# 예외

하늘이가 자는 모습을 보며 아주 흐뭇해 하더구나. 귀엽다를 연발하는 네 모습이 오히려 귀여웠다.

"세상에 저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거야."

이럴 때 괜히 비틀고 싶은 게 아빠 심보다. '단 한 명도 없다'는 오만한 명제에 제동을 걸고 싶기도 했고. 아빠 하는 일이 좀 그래.

"안 귀여운데."
"한 명 있네."

재빠르게 오류를 수정하는 침착한 대응이 멋졌다.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게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던 '딸에게 말로 안 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다.



# 엄마 같은 엄마

친구들과 놀다 보니 엄마가 네게 얼마나 잔소리를 하지 않는지 느껴지니? 엄마 장점이고 아빠 영향력이라고 잘 차린 밥상에 국자 하나 올려 보마.

"엄마, 엄마는 왜 내가 숙제 같은 거 안 할 때 뭐라 안 해?"
"네 숙제잖아. 엄마가 물어봤는데 안 하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책임은 예지가 져야 하는 것이고."
"엄마, 난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어."

엄마가 잔소리할 때도 있잖아. 이를테면 쩝쩝거리면서 먹을 때?

"예지, 지금도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어?"
"왜?"
"별 것도 아닌 걸로 잔소리하잖아."
"할 말은 해야지."

뜻밖에도 성격 깔끔하더라.



# 연휴

"아빠, 연휴가 끝나서 너무 섭섭해. 학교 갈 생각하니 에휴."
"예지, 아마도 예지가 학교 다니지 않고, 엄마와 아빠가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면 연휴가 얼마나 좋은지 잘 모를 거야."
"그렇기는 하지. 하기야 놀면 연휴가 무슨 소용 있겠어." 

금방 이해하니 참 좋았다. 하지만, 아빠도 말뿐이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할머니는 왜?

수학 문제를 풀던 네가 갑자기 눈물을 뚝 떨어뜨리더구나.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공부도 기분이 좋을 때나 쪼끔 하는 거지 뭐.

"아빠, 그게 아니라 잘하고 싶은데 잘 안 돼서 속상해."

엄마 닮아서 욕심이 많구나.

"예지, 괜찮아. 모르는 문제를 만나는 게 공부고 그걸 다시 알아가는 게 공부야. 생각해 봐. 계속 아는 것만 나오면 이상하지 않냐? 앞으로 계속 1 더하기 1만 나오면 예지야 틀리지 않고 신나게 잘하겠지. 그렇게 잘하고 싶은 게 아니잖아."

마치 3개월 전부터 질문을 예상하고 원고를 준비해 외운 듯 막힘 없는 아빠 말에 어느새 눈물이 그쳤더라. 뭔가 알아들었을 때 반짝이는 그 얼굴이 보여 마음이 놓였다.

"나 괜찮아. 잘할 수 있을 것 같어."

그래, 믿는다. 그나저나 네 할머니는 이렇게 좋게 얘기하면 될 것을 왜 공부에 지친 어린(?) 아빠를 그렇게 팼는지 참.



# 사고와 장난

달마다 한 번씩 자리를 바꾼다며? 주변에 앉은 수컷(?)들이 예사롭지 않은가 보구나. 머리를 갸웃거리며 걱정하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얘는 장난을 많이 치고, 쟤는 말이 너무 많고, 얘도 장난을 많이 치고, 얘는 사고를 많이 치고."

힘든 나날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장난치는 것과 사고치는 것은 뭐가 다른 지 궁금했다.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는데 선생님한테 혼나면 사고, 혼나지 않으면 장난이야."

그것을 왜 모르느냐는 표정으로 답하길래 움찔했다. 아주 깔끔한 정리구나.



# 패션

너는 아기 때부터 몸에 열이 많았다. 웬만한 추위는 그냥 무시하고 밤에 자다가 이불 걷어차기 일쑤였다. 집에서도 걸핏하면 갑갑하다며 옷을 벗고 다녔다. 차에 히터 틀면 창문 열기 바빴다.

얼마 전 엄마가 사 준 러시아에서도 버틸 것 같은 외투는 진짜 마음에 드나 보다. 추우면 당연히 입고 가고, 덜 추우면 앞에 지퍼 열고 입으면 된다고 하고, 더우면 벗고 있으면 된다면서 입고 나가고.

"예지야, 오늘은 포근한데. 그 외투 입으면 진짜 더울 텐데."
"엄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 추울 수도 있잖아."

진짜 마음에 드나 보다.



# 게임

<마인크래프트>라는 스마트폰 게임을 하더구나. 예부터 아빠 주변 아빠들은 자식을 빼앗은 게임과 전쟁에서 처참하게 당한 사연을 종종 하소연했다.

"예지, 마인크래프트가 예지 베스트 게임 중에 몇 등이야?"
"마크? 4등?"

1~3등이 더 있어 당황했다. 게임이 궁금해서 설명을 부탁한 것은 아니었단다. 어쨌든 30분 동안 신나게 게임을 설명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와! 진짜 재밌겠네. 마크가 4등 할 만하네. 아빠도 해보고 싶다. 다음에 또 설명해 줘. 그리고 오늘은 좀 쉬고."
"네!"

스마트폰을 놓고 나서야 겨우 숙제 생각이 났나 보구나. 어쨌든 이게 아빠 방식이다. 언제까지 통할지는 모르겠다만.



# 주문

저녁 메뉴를 물었다. 엄마가 끓여놓은 국도 있고 카레도 있었다. 반응이 시원찮아서 피자나 치킨 같은 거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잠시 망설이던 네가 이렇게 말했다.

"아빠, 오늘 학원 마치고 나오는데 1층에서 치킨 냄새가 좋았어."

솔직히 아빠는 여성 동지들이 애용하는 이 같은 표현 방식이 좀 어렵고 힘들다.



# 성전환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설거지 얘기를 하다 보니 엄마 속 남성성과 아빠 속 여성성까지 얘기하게 됐다. 그나저나 성전환에 대한 네 생각이 갑자기 궁금하더구나.

"물론, 자기 그대로 모습을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 자기 모습을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이 정도 답도 충분한데 괜히 한 번 더 물었다. 너무 궁금했거든.

"남자가 여자, 여자가 남자로 바뀌면 친구들이 놀리지 않을까?"
"그런 걸로 놀리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도 잘 못할 거 같아." 

아!



# 부석사

할머니가 계시는 경기도 부천을 들렀다가 강원도 속초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애초 일정이었다. 하지만 실세인 네가 한살 터울 언니와 놀다 발가락을 다쳐 깁스를 하는 바람에 일정이 틀어졌다. 언니와 더 놀아서 좋다며 붕대 감은 발을 흔드는 너를 보며 엄마와 함께 웃고 또 웃었다.

부산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경북 영주를 들렀다. 가까스로 가족이 맞춘 휴가를 공치는 게 아쉬웠단다. 부천에서 부산까지 안 그래도 먼 길, 크게 에둘러가지 않는 곳을 고민하다 떠올린 곳인 부석사다. 목발을 짚고도 신난 너를 업고 무량수전 앞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네가 더 크거나 내 몸이 더 버티지 못해 곧 없을 일이라 생각하니 무거운 걸음은 버겁고 또 섭섭했다.

무량수전 앞에서 그 어여쁨을 더듬으며 말을 고르고 또 골랐을 배순우 선생 글을 찾아 읽어줬다. 이렇게 시작하는 글이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초등학생이 알아듣기에는 버거운 단어가 섞였다는 것은 읽고 나서야 눈치챘다. 생글생글 웃으며 듣는 네 표정을 보면서 우리는 이만큼만 허락돼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 사고 처리

학교에서 친구와 부딪혔다며? 이마에 희미한 자국이 남은 것으로 봐서 꽤 충격이 컸나 보더구나. 친구는 뒤통수를 움켜쥐며 뒹굴었다고.

"아빠, 내 실수도 있지만 옆에서 다른 친구들이 나보고 잘못했다고 계속 얘기해서 더 속상했어."

일단 참치캔 두 개로 왜 추돌 사고 때는 100% 뒤차 책임인지부터 설명해야 했다. 다행히 잘 알아듣더구나. 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문제는 옆에서 계속 잘못했다고 얘기했던 친구들인데,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늘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해. 누구나 인정하는 빼어난 재주가 있으면 괜찮은데 그런 재주라는 게 또 누구에게나 있지는 않거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게 훨씬 쉬운 방법이야. 어른들은 더 심해. 그나저나 같은 상황에서 너라면 어떻게 했겠니?

"일단 부딪힌 친구들이 얼마나 다쳤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는 거 아냐?"

맞네. 그리고 많이 섭섭했겠다.



# 시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잘 자라는 네가 새삼 고맙다. 그래도 요즘은 영 편지를 쓰지 못했구나. 그래, 그런 시절이거든.

발가락을 다쳐 2주 전부터 깁스를 하고 있잖아. 편히 걸음을 옮길 수 없어 갑갑해하는 네가 안쓰럽다. 하지만, 네가 지금 사는 세상은 앞으로 깁스보다 훨씬 더 너를 구속하고 갑갑하게 할 게 분명하다. 그런 세상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사람들이 나서기로 했다. 2016년 11월 12일 바로 오늘이다.

우리 멀리는 못 가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러 가자. 깁스한 발에는 두꺼운 엄마 양말을 신겨줄게. 시민이 주인이라는 나라에서 내가 주인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모든 사람과 서로 응원하자. 부끄럽지만 4년 전 네게 했던 말을 한 번 더 할게.

"넌 원칙과 상식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라. 그건 당연히 딛고 버틸 땅이지 애써야만 따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란다."



# 생일 카드

아빠 생일이라고 카드를 내밀 때 선물이 없다는 것 정도는 바로 깨달았다. 엄마 생일도 그렇게 넘겼는데 아빠는 뭐. 하지만 내용은 정말 환상적이었어. 특히 삼행시에서 울컥했다.

이...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승... 승! 환! 우리 아빠시죠
환... 환각인가?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내 아빠라니!

쉽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네 엄마는 그런 아빠가 자기 남편이라는 것을 알까?



# 경쟁

샌드위치가 두 조각 남았다. 모양과 내용물이 서로 다른 샌드위치구나. 미리 정리해놓지 않으면 한 조각 남았을 때 곤란한 상황이 생긴다. 그런 일 혹시 겪어보지 않았니?

"예지, 둘 중에 하나 골라. 둘 다 먹을 수는 없어."
"알아."

잠시 고민하던 너는 네모 샌드위치를 골라 집어들더구나. 입으로 넣으려는 순간 아빠가 제지하면서 말했다.

"잠깐, 아빠도 그거."

입으로 향하던 손을 멈추며 움찔하는 네 표정이 웃겼다. 당연히 이런 일은 처음 겪었을 테니. 하지만 너도 슬슬 이런 일을 겪을 나이가 됐다. 십대잖아.

"가위바위보 해."

알지? 꼭 이런 상황에서는 아빠가 이긴다는 거. 무슨 법칙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빠가 이겼으니까 이긴 사람 마음대로 할게. 예지가 네모 먹어."
"그러려면 왜 가위바위보 했어?"
"이겼지만 양보하는 모습 멋있지 않아?"
"아니."

져서 심통부리는 거 안다.



# 양말

식탁 위에 네 양말이 굴러다니더구나. 식탁 위에 말이다.

"예지, 이 양말 신은 거야, 안 신은 거야?"
"바닥 시꺼매? 안 시꺼매?"

멀찌감치서 집중해서 보던 너는 오히려 되묻더구나. 그러니까 아빠가 그거 보기 싫어서 너에게 묻잖아. 이 자식아!



# 속뜻

아빠가 엄마에게 이렇게 인사했잖아.

"미운 엄마 안녕?"

그게 영 마음에 걸렸나 보구나.

"아빠, 엄마가 왜 미워?"
"예지, 아빠가 미운 예지 안녕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들어?"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네가 내놓은 답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단다.

"아, 귀엽다는 뜻이구나!"



# 고무장갑

손가락 사이 (주부)습진이 생긴 아빠에게 엄마는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라 했잖아.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분홍색 고무장갑은 무슨!"

그냥 맨손으로 했다. 싸나이 아니겠니!

"아빠, 그런데 고무장갑이랑 자존심이 무슨 상관이야?"

날카로움 인정! 그러니까 아빠 말에서 유머 포인트는 어차피 설거지를 할 거면서 고무장갑을 핑계로 남자 자존심 운운하는 데 있단다. 아직은 좀 어려울 것이다.



# 칭찬

무거운 수레를 들고 계단 가운데서 끙끙거리는 할아버지를 봤잖아. 아빠가 가뿐하게 해결했지. 히어로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걸으면서 아빠 팔짱을 살며시 끼던 너는 조금 전 감동을 전하더구나.

"아빠, 다른 사람을 도우니까 기분이 좋아."
"응, 아빠도."

그 정도로 뭔가 부족했니?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나즈막하게 얘기했지.

"아빠, 저널리스트 같어."

그 말을 생각해낸다고 뜸을 들였구나. 그나저나 예전에 엄마가 자기 말을 자꾸 왜곡한다고 아빠에게 '기레기'라고 했던 거 아니? 무슨 뜻이냐고? 몰라도 된다.



# 비틀즈

마주앉은 너에게 갑자기 이런 미션을 줬다.

"예지, 아빠가 말하는 단어와 반대되는 단어 말해 봐."
"응."
"yes."
"no."
"stop."
"go."
"good-bye."
"hello. 그런데, 아빠 왜?"

그리고 아빠가 들려 준 노래가 'Hello, Goodbye'. 우리가 나눈 대화로 만든 노래다. 눈을 반짝거리며 신기한 듯 미소짓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나저나 비틀즈 이 아저씨들 대단하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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