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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to ye-ji

2017년 열한 살

# 배웅

새해 첫날부터 당직까지 걸려 일찍 나가게 됐다. 급하게 나가는데 화장실에서 네가 나오더구나.

"회사 가?"
"응, 일찍 일어났네."
"잘 다녀와. 사랑해."
"아빠도 사랑해."

공중으로 날려 보내는 네 키스를 미쳤다고 피하겠니. 이렇게 부녀가 달달한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엄마는 주무시는 중이었다. 아내 빈자리를 딸이 채운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저녁에 보자.



# 인라인 스케이트

방학 동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자전거로 바꿔주지도 않았고 아이스링크에 가서 스케이트를 타지도 않았지. 그렇다고 가족이 여행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대놓고 투정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소멸되는 방학을 아쉬워하는 모습이 딱했다.

"예지, 인라인 스케이트 살까? 자연스럽게 스케이트 연습도 되니 아이스링크에서 따로 연습할 필요도 없고, 언제든지 가까운 곳에서 탈 수도 있고."
"좋아!"

네가 좋아하는 디자인, 색깔로 인라인 스케이트와 보호장비를 갖췄다. 당장 타고 싶어 매서운 바람에도 춥지 않다며 버티는 네 마음을 왜 모르겠니. 제자리에 서기도 힘들 텐데 몇 걸음 옮기며 미끄러지는 게 곧 배우겠더라. 집에 들어오는 길에 아빠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기쁨을 감추질 못하더구나. 엄마 닮아가지고. 큰 위기를 넘긴 듯해 한숨 돌렸다.



# 발치

엄마 없는 주말에는 치킨이다. 마주보며 너는 콜라, 아빠는 와인. 언젠가부터 먹는 속도가 아빠와 다를 바 없구나. 괜히 긴장한다.

"아빠, 이거 뼈가 이상해."

자그마한 조각이 닭에서 나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이상했다. 삼키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기야 어릴 때부터 가늘고 작은 생선뼈도 입안에서 발라낼 정도로 예민했구나.

"아빠, 이쪽이 허전해."

입을 벌리며 가리킨 쪽을 보니 이가 하나 없고 피가 살짝 고여 있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정상적인 닭뼈 사이에 둔 그 이상한 뼈를 기어이 찾아냈다. 빠진 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한 뼈는 아주 정상적으로 생겼더구나. 아빠도 어렸을 때 사과 먹다가 이가 사과에 박혀서 나온 적은 있다만.

"흐흐, 하나도 안 아퍼. 대박!"



# 사랑

사랑, 사랑이라는 게 단정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개념인 것은 맞다. 그래도 네가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아빠 답은 간단하다.

"그 사람 얼굴에서 늘 웃음을 보고 싶은 마음."



# 편애

하얀 옷을 입고 뭘 먹는 것을 보면 괜히 불안하다. 김칫국물, 라면국물 같은 게 튀면 치명적이잖아. 옷은 빨면 그만이지만 그 상황을 그냥 넘기는 엄마가 흔하지는 않다. 며칠 전 친구들과 포도주스를 마실 때 옷에 주스를 흘린 너를 보고 친구가 깜짝 놀랐다면서?

"너네 엄마는 옷에 뭐 묻히면 뭐라 안 해?"
"뭐라 안 하는데."
"너네 엄마 진짜 친절하시구나."
"너네 엄마는 안 친절해?"

그러니까 그런 친절이 아주 드물단다.



# 그림 같은 수학

재주 많고 심성 바른 네가 수학을 힘겨워한다는 게 어떤 면에서 다행이다. 잘 읽고 잘 그리는 것만 해도 어디냐. 하찮은 약점 하나가 앞으로 너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어쨌든 오랜만에 받은 네 메시지는 반가웠다.

"오늘 전개도를 배웠는데 난생 처음 수학이 미술같았다능 >3<"

웃기면서도 짠하더구나. 게다가 키스마크라니.



# 천재

함께 살다 보면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한다. 너는 부쩍 자라건만 정작 6살 이예지 양과 11살 이예지 양 차이는 뭔가 계기가 있어야 알아채곤 하지. 이를테면 끼니를 제때 채우지 못한 아빠가 집으로 들어가면서 엄마에게 밥 말고 안주 비슷한 거 없냐고 단톡방에서 물었잖아. 엄마는 고기, 소시지, 만두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고. 자애로운 메뉴에 허우적거리며 고민에 빠진 순간 네가 냉큼 답글을 달더구나.

"안주는 소세지 아니면 만두지."

네가 어찌 그렇게 확신에 가득 찬 답글을 달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답글을 본 순간 아빠 느낌은 이랬다. 천재 아니야?



# 연대할까?

"예지, 요즘 며칠 동안 아이스크림 계속 먹었어."
"아닌데."

부정하는 네 눈가가 벌써 촉촉했다. 엄마도 뒤늦게 정정보도를 하더구나.

"아, 맞다 어제 안 먹었지?"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은 침통하더구나. 쉽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빠가 물었다.

"아빠는 예지가 아이스크림 계속 먹어도 상관없는데 뭐가 섭섭해?"
"계속 먹은 게 아닌데 엄마가…."

그래, 그 심정 완전 이해한다. 따지고 보면 아빠도 술을 맨날 마시지는 않아. 하루 건너뛰는 날도 분명히 있지. 그런 아빠에게 엄마는 어이없게 '맨날 술 마신다'며 다그치곤 하잖아. 네 마음이 곧 아빠 마음, 아빠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이제 우리 연대할까?



# 첫인상

뭐가 불만인지 시무룩한 얼굴을 보다 못해 이런 기술을 걸었다.

"예지, 너는 왜 시무룩해도 예뻐? 아빠는 그나마 웃으면 봐 줄만 하고 시무룩하면 완전 밥맛 없는데, 너는 시무룩해도 예쁘고 웃으면 더 예쁘네."

굳었던 얼굴이 반쯤 풀리면서 배시시 웃더구나. 조금 풀렸니?

"아빠가 그런 건 나에 대한 첫인상이 좋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굳이 설명까지 할 필요는 없었단다.



# 드라이

"엄마, 머리를 덜 말리면 청순해 보인다던데."
"아니, 게을러 보일 수도 있지."

얘야, 작전 실패다. 드라이해야겠다.



# 멋있을 때

"딸들은 아빠가 멋있다고 하던데 예지도 그래?"
"응."
"언제?"
"일할 때, 요리할 때, 같이 놀 때."

그러니까 뭐라도 도움이 돼야 하는구나.



# 결혼과 행복

"아빠, 결혼하면 행복해?"

길에서 갑자기 질문하기 있니? 살짝 움찔했다.

"예지 보기에 엄마, 아빠 어때?"
"행복해 보여."
"맞아. 행복해."

활짝 웃는 모습이 예뻤다. 이제 네가 답할 차례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했을까?

"인터넷에서 다른 거 찾다가."

그 인터넷이 문제구나. 만나기로 약속한 식당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에게 후다닥 달려가는 네 모습을 보는 것도 결혼해서 생긴 행복이다.



# 스마트폰

스마트폰으로 게임, 동영상, 카톡, 채팅까지 차근차근 정복하는 너를 걱정하던 엄마가 드디어 결단했다. 딸을 바꿀 수 없으니 기계를 바꾸기로. 당연한 결정이다. 그래도 늘 하던 것처럼 선택은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엄마는 그 재미있는 물건 사용을 네 스스로 적절하게 조정할 수 없다는 점, 엄마나 아빠가 옆에서 항상 살피며 도와줄 수 없다는 점 등을 얘기했다. 아빠는 재미를 찾는 게 사람에게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스마트폰이 앞으로 더 재미있는 무언가를 할 기회를 뺐는다는 점을 얘기했지. 이제 네 생각을 들을 차례다.

"게임이나 인터넷이 되지 않는 그냥 휴대전화를 쓰는 방법도 괜찮을 것 같아."

멀쩡한 아이폰을 두고 2G폰을 쓰게됐구나. 큰 결정을 한 그날 너는 자기 전에 엄마를 살짝 불러 괜찮은 척했지만 많이 섭섭했다고 고백했지. 다음 날 아빠에게는 또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나 사실 아이폰을 쓰지 못해 섭섭한데 더 재밌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

사람 마음 움직이는 능력은 엄마보다 네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감기와 오해

감기·몸살이라고? 코를 풀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참 안쓰러웠다. 학교 수업이 어렵겠더구나. 하루 쉬어야지? 힘겨운 듯 고개만 끄덕였지만 표정은 한결 밝아지더라. 아빠가 그런 순간은 또 잘 잡아낸다. 어쨌든 엄마·아빠는 출근하니 외할머니 댁에 가야지. 그래, 네 파란 나라. 천사 같은 외할머니가 살고 꿈과 사랑이 가득하며 숙제 따위 없는 곳. 차에서 내리는 네 한 손에는 심심할 때 보겠다며 챙긴 책이 가득한 가방, 다른 한 손에는 네 엄마가 반찬 얻어올 때마다 챙겼던 빈 플라스틱 통을 가득 담은 큰 봉투가 있었다.

"아빠, 잘 다녀와. 사랑해."

양손에 제법 묵직한 짐을 들고 외할머니 댁으로 뛰어가는(?) 네가 참 건강해 보였다. 물론 오해겠지? 어서 회복하거라.



# 추천도서

"아빠, 나 여기 이 책들 다 읽었어."

책장 한 줄을 가리키면서 자랑하더구나. 장하다. 이 순간 '대단하다' 같은 영혼 없는 칭찬은 평범한 아빠들이나 하는 대응이고 비범한 아빠 대사는 이렇다.

"오! 그래? 혹시 아빠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있어?"

잠시 고민하던 너는 <복숭아 부부>라는 책을 꺼내서 내밀더라.

"무슨 내용이야?"
"사이좋은 부부가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는 얘기야."

그래? 많은 교훈을 얻으마.



# 구분

집에서 전과목 100점을 받은 친구가 부러웠다며 펑펑 울었다고? 엄마는 늘 그렇듯 갑갑한 모범답안을 내놓았더구나. 열심히 하라니 말이다. 게다가 그날 저녁 수학 숙제를 앞에 놓고 하기 싫은 티를 내는 너에게 엄마가 또 한마디 했다더라.

"예지, 공부 잘하고 싶다면서. 그러면 숙제도 열심히 해야지."
"아니 내가 부럽다고 했지 언제 잘하고 싶다고 했어?"

또 펑펑 울었다더구나. 부러운 것과 잘하고 싶은 게 어찌 같단 말이냐. 구분 못한 엄마 잘못이다.



# 이상한 나라

<이상한 나라 앨리스>라는 책을 읽더구나. 마침 학교에서 네 영어 이름이 '앨리스'라는 것을 알았다.

"예지 이야기 읽네."
"흐흐, 맞아. 그런데 나는 이상한 나라에 안 살아서."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책보다 더 이상한 나라였다. 이제 이상하지 않은 나라가 되려고 애쓰는 중이지. 이상하지 않은 나라 앨리스, 아니 이예지로 살았으면 좋겠다.



# 투표

"엄마랑 아빠는 이번에 대통령 누구 찍어?"

궁금했니? 그래도 가르쳐 주지 않기로 했다. 보통, 자유, 비밀, 평등 뭐 이런 선거 원칙 따위 문제가 아니란다. 돌이켜보면 아빠 어렸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어른들이 무심코 뱉는 정치(인) 평이 고스란히 아이들 정치 성향으로 고정됐던 것 같아서 말이다. 정치적 성향, 지지하는 정치인은 네가 차차 정하려무나. 신중하게.

"아빠,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홍준표는 안 돼."
"왜?"
"무상급식 없앴다던데."

그래, 그런 식으로 네가 판단하면 되는 거다.



# 개과천선

"아빠는 왜 차에서 욕을 해?"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서 엄마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웃더라. 일단 최근 몇 차례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례를 과학수사대처럼 검증하며 스스로 변호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물불 가리지 않고 욕이 나온다는 논리였지. 너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알겠고, 그래도 욕은 안 했으면 좋겠어."

그래, 그러자. 아빠는 이거 하나는 잘 안다. 당장 정권이 바뀌더라도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거. 자신을 스스로 아주 조금씩 바꾼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세상 바뀌는 게 그렇게 쉬울 리 없잖아. 그래도 오늘 봤니? 고속도로에서 깜빡이도 넣지 않고 밀고 들어오는 차를 향해 아빠가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잖아.

"아이고 깜짝이야. 저분 운전이 참 난폭하구나."

너는 엄마와 함께 아주 꺽꺽거리며 웃더구나. 그게 그렇게 웃겼니? 너무 웃기지만 그래도 괜찮고 좋다는 말에 뿌듯했다. 이 나이 먹고 조금씩이라도 변한다는 게, 더 나아진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너도 언젠가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의심

엄마가 외할머니 집에 가자고 제안했더니 이렇게 되물었다면서?

"왜? 밥하기 싫어?"

꽤 날카로운 질문에 감탄했다.



# 대통령

"아빠, 대통령을 잘 뽑은 거 같아요."

엄마와 뉴스를 보는데 네가 그렇게 말해 깜짝 놀랐단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조금만 생각하니 간단하더구나. 얼마 전만 해도 뉴스 보면서 욕하고 한숨 쉬고 머리 뜯고 하다가 요 며칠 좋네, 잘했네, 다행이네 이러고 앉아 있으니 말이다. 네가 세상과 접촉하는 통로로써 부모 역할을 잠시 생각했다.



# 지구 지킴이

"예지, 그만 먹어?"
"응, 배불러."

그러니까 어쩌면 그렇게 애매하게 남길 수 있을까. 밥 두 숟갈 반이 참 그렇다. 한 끼로는 부족하고 그대로 설거지통에 넣을 수는 없고. 요기조기 뜯긴 생선과 께적거린 반찬, 밥 두 숟갈 반을 처리하고자 아빠는 밥그릇에 물을 붓는다. 기억해라. 네가 동물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아이일지는 몰라도 지구는 아빠가 지킨다는 것을.



# 앙갚음

친구들이 카드놀이에 끼워주지 않았다고? 혼자 된 것 같아 슬펐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

"복수해. 다음에 예지도 친구가 끼워달라면 싫다고 하면 되겠네."
"안 돼. 혼자인 것 같은 기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어."

아빠보다 낫다.



# 6신

'6신을 바쳐 나라를 지킨 분들을 위한 날'.

달력 6월 옆에 이렇게 적어뒀구나. 읽고 한참 뭔 말인가 했다. 그러니까 'six body'가 되는 셈인데, 굳이 수정하지 않기로 했다. 알고 그랬겠지. 아니더라도 때 되면 알겠지 뭐.



# 상대적 가치

자신 없는 수학 시험에서 92점을 받았다며? 그동안 노력이 보상받나 보다. 뿌듯해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지난 시험에서 84점 받았는데 이번에 92점 받았어요."

그래? 아빠는 네가 84점 받은 시험이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92점이 얼마나 대단한 점수인지 강조하려면 84점이 필요했겠지. 가치라는 게 늘 상대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듯해 흐뭇했다.



# 친구

아쉬우면 너를 찾았다가 아쉬울 게 없으면 너를 험담하고 따돌리는 괘씸한 아이 얘기를 들었다. 너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더구나. 친구가 늘 아쉬운 너는 모질게 선을 긋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면서? 네가 엄마만큼 강하고 단호하면 좋겠다.

"예지, 너 친구가 되고 싶어 장난감이 되고 싶어?"
"친구요."
"필요할 때 찾고 필요 없을 때 홀대하면 그게 친구야, 장난감이야?"
"장난감이요."
"아빠는 예지가 누구에게나 좋은 친구가 되는 걸 바라지 누구 장난감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아."

잠깐 다부지게 바뀐 네 표정을 엄마가 봤는지 모르겠다. 당장은 쉽지 않겠지만 앞으로 잘 대응하려무나. 너에게 만만찮을 그 고비를 넘기는 게 또 성장이다.



# 생존수영

오늘 생존수영을 배운다면서? 잘 생존하기를 바란다. 문밖을 나서는 표정이 어쩌면 그리 밝고 걸음은 가벼운지. 아빠 머릿속에서 생존수영 수업이 기대된다는 네 말은 이렇게 번역됐다.

"학교 수업만 아니면 돼요!"

엄마는 초등학교에서 맨날 저런 수업만 하면 좋겠다더라. 아빠도 찬성이다. 최소한 초등학교만이라도 학교 가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수업만 하면 안 될까?

 

# 독점

네 취향을 몰라 두 가지 종류 아이스바를 샀다. 당장 하나를 골라 먹길래 네 취향이 그쪽인가 보다 생각했다. 하루 지나 냉동실을 보니 다른 아이스바 두 개만 남았더구나. 아빠 몫인가 생각했는데 엄마가 그러더라.

"예지가 남은 아이스바는 아껴 먹는다던데."

그래, 혼자 다 먹겠다는 말이잖아.



# 에어컨

에어컨을 틀어놓고 바지는 입지 않은 채 비옷 같은 가벼운 점퍼만 하나 걸쳤구나.

"에어컨 틀어놓고 점퍼를 입으면 어떡해?"
"얼굴하고 다리는 더운데 몸은 추워서요."

묘하게 설득될 뻔했다.



# 가족

얼마 전 장난감과 친구 차이를 가르쳐 줬다. 이번에는 가족과 장난감 차이를 말해야겠다. 놀고 싶을 때만 하늘이(고양이)를 찾고 평소 방치하며 네 할 일을 하지 않는 게 영 괘씸했거든. 일단 며칠째 쌓인 똥, 털로 뒤덮인 침대보와 이불을 더는 볼 수 없었다. 야무지게 나무라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예지, 한 시간 뒤에 네 생각을 얘기해. 네 생각을 듣고 하늘이 키울 건지 말 건지 결정할 거야!"

한 시간이 채 되기 전에 쭈뼛거리며 다가오더구나.

"아빠, 앞으로 화장실도 제가 잘 치우고 하늘이가 제 방에는 혼자 못 들어가게 할게요."
"좋아, 장난감과 가족의 차이는 뭐야?"
"장난감은 놀고 싶을 때만 찾는 거고, 가족은 잘 놀고 서로 잘 돌봐줘야 해요."

앞으로 약속을 가끔 어긴다고 그때마다 뭐라 하지는 않을 거다. 한 가지만 기억하자. 하늘이는 네 장난감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다. 물론, 아빠는 그 고양이가 좀 싫다만.



# 쿵쿵따

요즘 쿵쿵따가 부활하려나 보다. 한때 아빠 새벽을 불태웠던 게임이란다. 너는 했던 단어를 또 해도 된다는 규칙이 꽤 마음에 드나 보더구나. 한참 기러기를 주고받으며 깔깔거렸지. 승부보다 적응에 방점을 찍고 네 리듬에 맞춰 쿵쿵따를 진행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냥꾼'이라니!

"꾼, 꾼, 생각나는 게 없는데. 아빠가 졌네."
"꾼꼬또."
"응?"
"꾼꼬또, 귀신 꾼꼬또."

그래, 맞다. 반칙 아니다.



# 전략 공개

엄마를 위한 무슨 전략을 짤 때면 그 원대한(?) 구상을 너에게만은 단계적으로 공개하곤 한다. 이를테면 꽤 괜찮은 식당을 예약할 때 말이다.

"예지, 오늘 엄마가 좋아할 식당을 예약했어! 이 아빠가 말이야!"
"진짜? 아빠 최고!"

엄마를 위한 일이라면 너는 늘 진심으로 기뻐하는구나. 아빠가 이런 고민 과정을 너에게 공개하는 이유는 있다. 언젠가 네가 아빠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거든.



# 함정

"예지가 자기 얼굴은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못생겼다고 하고, 나는 또 다른 엄마들보다 예쁘다네. 기준을 잘 모르겠어. 사실 그렇지는 않잖아."

스스로 외모를 아쉬워하는 것은 흔한 고민이다. 사람들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이 늘 있거든. 그 결핍을 하나씩 극복하면서 이미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아가는 게 삶에서 중요한 과제란다. 그나저나 엄마가 함정 파놓은 거 봤니? 다행히 아빠는 눈치챘다. 살짝 위험했어.

"아냐, 나도 예지 생각과 똑같아. 당신이 예쁘다고 생각해."

조금만 타이밍이 늦었다면… 아니다, 됐다.



# 못생김

학원에서 남자 애가 이렇게 말했다며?

"야, 네 얼굴에 김 묻었어."
"무슨 김?"
"못생김."

안 그래도 외모가 좀 고민인 예민한 여학생에게 제법 큰 엿을 먹였네. 예나 지금이나 사내들 수법은 거기서 거기구나. 수줍음 많은 것들.



# 취재

"아빠, 오늘 저녁에도 술 마셔?"
"아니, 어제처럼 마실 수는 없지."
"그게 아니라 술 또 마실 거냐고."
"그러니까 어제처럼 마실 수 없다고."
"내 말은 지금 술 마실 거냐고?"
"어제처럼 또 많이 마실 수는 없다니까."
"그게 아니라!"

답답했니? 너도 집요하더라. 식탁에 놓인 술병을 보고도 거듭 확인하고 따지려 드는 게 저널리스트 같았어.



# 사춘기

"아빠, 사춘기가 뭐에요?"

놀랍게도 답은 이미 준비해뒀다. 아빠 생각에 사춘기는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며 갈등하는 시기인 것 같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현실·환경과 화해하며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이루는 게 성장이겠지. 그래서 사춘기는 성장하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일 거야. 그 과정 때문에 피곤한 일이 덜했으면 하는 것은 아빠 바람이고.

 

# 먹는 순서

네가 먹을 컵 아이스크림과 아빠가 먹을 팥빙수를 주문했다. 아르바이트 언니가 팥빙수 숟가락을 두 개 챙겨 주더구나. 눈치가 좀 없다 생각했지만 굳이 막지는 않았다. 아이스크림은 네 앞에, 팥빙수 그릇을 가운데 놓았지. 너는 줄기차게 팥빙수만 먹더구나. 가게 냉방 상태가 우수한지 아이스크림은 녹지도 않네. 그래, 짜장과 탕수육을 같이 시켰으면 '우리' 탕수육 먼저 먹는 게 맞다. '내' 짜장은 천천히 먹는 거지. 순서를 정확히 아는 듯해 다행이다.



# 귀를 기울이면

미야자키 할아버지가 만든 <귀를 기울이면>을 본 게 1996년 어느 날 아침이었다. 숙취에 시달리며 아무 기대 없이 본 만화에 금세 빠져들더구나. 한참 얼 빠진 채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단다. 저기에 나오는 아빠, 할아버지, 이웃 같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네. 그리고 혹시 딸이 생기면 이 영화 꼭 보여줘야겠다.

"아빠, 진짜 재밌어요."

21년 만에 소원을 이뤘다.



# 반전

엄마가 해 주는 떡볶이가 가장 맛있지만 아빠가 해 주는 것도 비슷하게 맛있다니 고맙다. 배려심보다 아빠를 참 잘 부려먹는다는 느낌은 받는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예지, 이렇게 맛있고 맵지도 않고 영양 가득한 떡볶이를 만든…"

너는 분명히 '사람은 누구'라는 질문을 예상했을 테다. 입술 끝에는 '엄마'라는 단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구나. 여기서 비범한 아빠는 한 발 더 나간다.

"만든… 사람을 구한 사람이 누구야?"

한참 입술 끝에 머물렀던 '엄마'라는 단어를 허공에 날리면서 너는 깊은 콧방귀와 함께 야무지게 말하더구나.

"아빠 진짜 미워!"

네 증오(?)는 마음이 아팠지만 재밌었단다.



# 뚝딱뚝딱

엄마가 만든 쌀국수가 참 그럴듯했다. 처음 해봤다면서 끙끙거리지도 않고 잘 만들더구나. 다른 음식도 그렇게 뚝딱뚝딱 만들어내곤 하지. 그러고 보니 너도 그림을 참 뚝딱뚝딱 그려내곤 하는 게 역시 엄마 닮았니?

"엄마는 음식을 뚝딱뚝딱, 예지는 그림을 뚝딱뚝딱, 우리 집 여성들은 참 뚝딱뚝딱 뭘 잘 만들어."
"아빠는 뭘 뚝딱뚝딱 잘 만들어?"

그런 질문을 '기습'이라고 한다. 사실 예지를 뚝딱뚝딱 잘 만들었다 답하고 싶었다만 좀 에로틱해서 참았다.

 

# 송금

얼마 전에 만든 네 통장이 용돈 간수에 요긴해 보이더라. 친척에게 받은 현금을 엄마·아빠 믿고 맡겨봤자 결국 지하경제(?)로 빠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고모부에게 받은 용돈을 아빠에게 맡기더구나.

"예지, 송금해줄까?"
"송금?"
"응, 아빠 통장에서 예지 통장으로 돈 보내는 거."

아빠 곁으로 바짝 달라붙는 게 그동안 돈을 맡길 때마다 불안했니? 휴대전화로 송금하는 과정을 확인한 너는 마지막에 진심을 담아 감탄사를 날리더구나. 아빠는 그렇게 빈 지갑에 현금을 확보했다. 길게 설명했다만 '용돈 깡'이네.



# 취향저격

"취저!"

아빠는 네가 선호하는 국물 양, 면발 식감, 계란 혼탁 정도를 정확하게 안다. 게다가 쪽파까지 썰어 올려 마무리하는 감각으로 미각과 후각은 물론 시각까지 사로잡았으니 어찌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니. 무엇보다 라면이잖아. 엄지를 쭉 내밀며 내뱉은 두 음절 뜻은 처음 들어도 그냥 알아먹겠더라.

취.향.저.격.

아빠가 좀 한다.



# 빵

엄마가 살짝 구운 식빵에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을 끼워 세 조각을 만들었을 때는 분명 아빠 몫도 있었을 테다. 그게 두 조각이든 한 조각이든 말이다. 복숭아를 우유와 함께 갈면서 잠깐 뒤돌아보니 세 번째 빵조각이 네 입으로 들어가더구나. 도대체 엄마는 네 성장속도를 어떻게 계산한다니? 재빨리 냉장고에서 푸딩을 꺼내 너에게 내밀 수밖에 없었다.

"예지, 푸딩이랑 빵이랑 바꿔 먹자."
"벌써 한입 먹었는데."
"괜찮아, 괜찮다고!"

아빠 빈속으로 출근할 뻔했다.



# 파인에플

"예지, 좋은 사과."

후식으로 나온 파인애플을 너에게 내밀며 센스 자랑을 했다. fine apple 괜찮았니? 너는 별 리액션 없이 파인애플을 아빠에게 내밀며 말하더구나.

"아빠 휴대폰."
"뭐?"
"아빠 휴대폰, 파인 사과."

파인 사과 세븐! 알아먹었다. 그리고 너 정말 마음에 든다.



# 척추측만

학교 건강검진에서 척추측만이 우려된다는 진단이 나왔다고 해 꽤 당황했다. 평소 비스듬히 누워서 책을 본다거나 태블릿을 할 때 따끔하게 뭐라 해야 했었나 후회도 했고. 다행히 심각하지는 않더구나. 교정운동 몇번 하면 바로잡을 수 있다더라. 물론 앞으로 관리는 중요하고.

"아빠, 허리가 쭉 펴진 느낌이에요."

어떻게 한 번 교정치료 받고 효과가 바로 나타나겠니. 그나저나 네 척추와 함께 우리 살림도 쭉 펴야 할 텐데.



# 현장 교육

아빠 가방에서 '국제신문 차승민은 퇴진하라'고 적힌 집회 카드를 꺼내 한참 보더구나. 반응이 궁금했다.

"아빠, 이 사람도 박근혜처럼 나쁜 짓 했어?"

그렇기는 한데··· 역시 교육은 이론보다 현장인가 보다.



# 자책

뭔가 켕기는 게 있었니? 뭐라 우물우물하는데 도저히 못알아 듣겠더구나.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단다.

"예지, 우물우물하지 말고 평소 얘기하듯이 얘기해. 못 알아듣겠어!"

자애로운 엄마가 아빠 마음을 조곤조곤 설명해주더구나. 그저 네가 당당하게 얘기했으면 했다. 그러고 보니 아빠도 늘 그렇지는 않더라. 스스로 탓할 일을 너에게 떠넘겼다 싶어 마음이 쓰렸다.



# 가방

"여보, 요즘 애들 들고다닌 거 있잖아. 젤리 같은 거."
"이거? 액체괴물."

엄마가 대답하기 전에 먼저 가방에서 꺼내더구나.

"어, 혹시 손에서 막 돌리는 그런 것도 있어?"
"아, 스피너."

또 가방에서 꺼내더구나.

"가방에 없는 게 없네. 너 들고다니는 선풍기..."
"응, 이거? 헤헤."

도대체 그 보조가방에 없는 게 뭐냐? 그나저나 책은 어디에 담았니? 신기하면서 궁금했다.

 

# 배움

유튜브를 스승 삼아 아이패드로 뚝딱뚝딱 그림 그리는 솜씨가 제법이구나.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림 그릴 때 즐겁다는 네 말에 더 감동했고.

"아빠 뭐 해?"
"공부해."
"기타 칠 줄 알잖아."
"근본 없이 막 배웠거든."

아빠도 기본부터 배워볼까 싶어 동영상을 찾아봤단다. 어느새 부모에게 자극을 주는 아이로 자랐구나. 기특하다.



# 욕설

"아빠, 우리 반 남자 애들 욕은 아닌데 욕 같은 그런 거 막 한다."

고작 예를 드는 게 2018년이더구나. 꼬마 수컷들이 무척 귀여웠다.

"아빠 그런 거 많이 알아. 전문이야. 예지 친구들 모아서 가르쳐주고 싶네."
"진짜?"

이런 식빵, 신발끈, 시베리아 오오츠크, 조카 십팔색깔 크레파스, 써클렌즈, 가족같은… 어땠니? 엄청 큭큭거리더구나. 늘 그렇듯 아빠가 자랑스러웠으면 좋겠다.



# 선행학습

같은 반 친구 엄마가 자기 아이는 중학교 과정까지 선행학습을 했는데, 고등학교까지 선행학습을 하는 친구도 있어 좌절감을 느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좌절감이라.

"예지, 선행학습 하는 거 있어?"
"선행학습?"
"지금 4학년 2학기니까 5학년 과정을 배운다던가."
"아! 수학 5학년 1학기 시작했어."

좌절감보다 더한 표현이 뭐가 있나?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단다.

"선행학습 시키는 부모들 결정도 존중해. 선행학습을 시키는 이유도 있고 안 시키는 이유도 있겠지. 그냥 교육은 늘 어려운 것 같아. 답이 정해진 것도 없고. 잘 관찰하고 고민하고 거들고 반성하고 후회하면서 아이와 어른이 같이 자라는 거지."



# 수학 시험

"엄마, 수학 시험을 쳤는데 두 개는 틀린 것 같고 세 개는 세모야."

며칠 뒤 결과를 확인하니 다섯 개 틀렸다더구나. 세모는 무슨, 다 틀린 거지 뭐. 90점 넘게 받을 수 있었다며 엄청 아까워 했다고 들었다. 네 엄마는 그냥 틀렸다고 하면 될 것을 세모라 했다고 피식 웃더라. 이상한 자존심이 있다며. 아빠는 어쩐지 네 마음이 이해가 됐어.

"예지, 수학 80점 넘게 받았다며? 확실히 아는 건데 틀렸지?"
"아! 진짜 아까웠어. 백퍼 아는 문제인데. 그런데 아는 거 틀렸는지 어떻게 알았어?"

이 바닥이 다 그렇다.



# 성장 속도

엄마가 야근이라며 집에 일찍 와서 너를 챙겨달라더구나. 그러기로 했다. 엄마가 마음이 놓였는지 메시지로 집에 치킨이 있다는 고급 정보도 보냈단다. 뭐가 됐든 안주가 있다는 것은 술 마시는 평범한 아빠들에게 복음 아니겠니. 집에 도착하니 역시 치킨이 있더구나. 뼈만 한 접시.

"학교 마치고 와서 배고파서 먹었어."

그래, 잘했다. 그나저나 엄마는 네 성장 속도를 도대체 어떻게 계산하는 거냐?



# 색깔

"아빠는 무슨 색깔이 좋아?"

짙은 파란색이라고 답하려다 한 번 더 고민했다. 미술을 좋아하는 네가 색 취향을 물었는데 빨주노초파남보 중에 하나를 답할 수는 없잖아. 어쩐지 없어 보일 수 있겠다는 감이 스쳤다. 뭔가 양념이 필요했지.

"혹시 인디고 블루 알아? 아빠는 그 색이 좋던데."
"오! 나도 좋아하는 색인데. 아빠, 코발트 블루도 좋아하겠네."

코발트 블루는 뭐냐?



# 핵심

오랜 연을 귀하게 여기고 가꾼 지인들과 잠깐 만나 명절에 앞서 정을 나누고 서로 삶을 북돋는 자리에 나서는 아빠에게 엄마가 묻더구나.

"술 마시러 가면서 가방은 왜 들고 가?"
"지갑, 휴대폰 손에 들고 다니다가 어디 떨어뜨릴까 봐."

뭔가 설명이 부족했니? 네가 다시 묻더구나.

"아빠, 가방까지 잃어버리면?"

핵심은 따로 있구나. 꽤 날카로웠다. 칭찬 먼저 하고 질문에 답하자면, 엄마가 가만둘 리 없다.



# 핏

잘 맞았던 청바지가 꽉 끼인다며 끙끙거리더구나. 앉았다 일어섰다 몇번 하면서 불편해 하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다. 그래도 그런 불편 속에서 장점을 찾을 수 있어야겠지.

"예지, 핏이 사네."
"핏? 핏이고 자시고!"

바지를 벗어 던지더구나. 어쩐지 속이 후련했다.



# 심쿵

갑자기 품으로 달려들더니 이마로 가슴팍을 들이받더구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네가 씨익 웃으며 하는 말에 당황했다.

"심쿵!"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에 적확한 말 같다만, 이럴 때 쓰는 말이 맞기는 맞냐?



# 성차별

"안 추워?"

밤에 티셔츠 한 장 달랑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온 아빠가 없어 보였니? 아빠는 그렇게 추위를 타지 않는 편이란다. 쌀쌀한 기운을 약간 즐기기도 하고.

"강한 남자라서 괜찮아."
"그거 성차별적 발언이야."
"왜?"
"남자니까 어떻고 여자니까 어떻고 하는 것은 성차별적 발언이야."

네 지적이 더 오싹했다.



# 자신과 자만

"자신감과 자만심 차이가 뭐에요?"

요즘 질문이 고급스러워서 참 좋다. 자신감은 자기 능력을 믿는 마음이고, 자만심은 자기 능력을 뽐내려는 마음 같은 흔한 답을 원했다면 아빠를 찾지도 않았겠지.

"좋아하는 사람이 잘난 척하면 자신감, 미워하는 사람이 잘난 척하면 자만심이지 뭐."
"그런가?"

정답은 네가 또 찾거라.



# 인사

엘리베이터에서 할아버지가 타니 인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표정도 영 떨떠름한 게 좀 그렇더라. 내릴 때도 인사하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가더구나.

"예지, 저 할아버지 알아?"
"아니, 몰라. 왜?"
"예쁘게 인사하는데 받아주지도 않아서. 기분 나쁘네."
"내가 인사하는 게 중요한 거지. 받아주는 것은 할아버지 마음이고."

'대인의 풍모'를 느꼈단다.



# 김영란법

어쩌다가 집에 빼빼로를 좀 쌓아두게 됐네. 학교에 몇통 들고 갔다고? 친구들과 잘 나눠 먹었다니 좋구나. 그런데 선생님은?

"선생님은 주고 싶었는데 못 줬어."
"왜?"
"김영란법 때문에. 선생님이 아예 안 받아."

그 법 주먹만큼이나 가깝구나. 마음 대로 줄 수 없는 섭섭함 잘 알겠다만 세상이 더 나아지는 과정이라 믿고 이해하자. 이제 선생님 주려고 했던 거 어서 내놓거라.



# 유소년

마트에서 야구 글러브를 한참 보고 있기에 의아했다. 이런 게 네 흥미를 끌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든.

"왜? 글러브 가지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왜 유소년 글러브야? 유소녀는 야구 안 해?"

아주 날카롭고 타당한 지적이다. 언젠가 '유소년 체육관' 얘기를 들을 때부터 그런 문제의식(?)을 품었다니 대견하구나. 유소년·유소녀 쓰지 말고 '어린이'로 바꾸면 좋겠다는 대안도 훌륭했다. 대안 없이 지르고 보는 어른도 많거든.



# 동시

학교 숙제로 쓴 동시 잘 읽었다. 외할머니를 향한 애틋한 사랑과 고마움, 자본주의에 종속된 어린이 삶이 잘 녹아 있더구나.


우리 할머니 - 이예지

학교 갔다와서 힘들면
쪼르르 달려가는
사우나
따뜻하게 해 주고
마실 것 챙겨주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눠주는
안방 사우나

모두 다 공짜

배 고플 때
터덜터덜 찾아가는
식당
다양한 음식
가리지 않고
다 맛있는 안방 식당

무조건 공짜
 


# 기대

"주말에 마늘 까야겠네. 간마늘이 다 떨어졌어."

은근슬쩍 주말 작업량을 툭 던지는 것은 엄마 감독 장기란다. 마침 아빠 앞에는 우리집 일꾼 꿈나무가 앉아 있었지.

"이번 주말 예지에게 기대가 커."
"왜?"
"마늘 야무지게 잘 까잖아."
"내가 좀 하기는 하지."

씩 웃는 얼굴에 담긴 자신감이 참 미덥더구나. 한발 빼도 될성 싶었다.

"아빠에게도 기대가 커."
"왜?"
"얼마나 엄마를 위하나 볼 수 있잖아."

죽어라고 까야겠구나!



# 고정관념

감기 기운이 있는 네가 약국에서 기어이 검은색 단색 마스크를 골랐다며? 무슨 유행인가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서 한 친구가 ‘연예인병’이냐며 비꼬았다고? 네 반격이 매서웠더구나.

"그거 고정관념 아니야?"

친구라고 가만 있었겠니? 그랬다면 시작조차 않았겠지.

"요즘 연예인들 다 그거 끼고 다니던데."

이미 물러설 단계를 넘어선 상황에서 네 재반격이 궁금했다.

"그게 네 고정관념이라고."

친구 처지에서 참 밉상이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 탁구

일주일에 두 번 배우는 탁구에 재미를 붙여 다행이다. 처음에는 날아오는 공에 라켓을 대는 것도 버거워하더니 조금씩 요령이 붙나 보더구나.

"이제는 그냥 제자리에서 치는 게 아니라 좌우로 움직이면서 치기 시작했어요."

좌우로 폴짝폴짝 뛰며 팔을 휘두르는 모습이 뭐랄까. 아주 다이나믹한 설명과 달리 꽤 정적이었으며 어떤 긴장감을 느끼기는 좀 어려웠단다. 점점 늘겠지 뭐.



# 마술

카드 한 벌을 반으로 나눠 고르게 했잖아. 고른 카드를 다시 4등분 해 식탁에 놓더구나. 가장 위에 있는 카드가 모두 에이스라서 깜짝 놀랐단다. 자신감이 붙은 너는 카드 한 장을 고르라더니 다시 섞은 뒤 한 장을 내밀었지.

"이거?"
"아니."

흠칫한 너는 카드를 펼치더니 두 장을 꺼내더구나.

"둘 중에 하나?"
"아닌데."

카드를 다시 섞은 너는 침착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구나.

"아빠, 다시 골라."
"왜?"
"실패했거든."

더없이 쿨한 태도가 더 마술 같았다.



# 텔레파시

탁구장에 간 네가 집에 올 시간이 되자 엄마가 휴대전화를 들더구나. 안방에서 TV를 보면서도 말이다. 잊지 마라. 네가 앞으로 몇살을 더 먹든 엄마 눈에는 그저 아기란다.

"예지, 어디야?"
"엄마, 나 집이야."
"집? 예지야, 집 어디야?"

방문이 벌컥 열리며 네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모녀 사이 2% 부족한 텔레파시조차 살짝 부러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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