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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to ye-ji

2018년 열두 살

# 12살

아빠 어릴 적 <캐빈은 12살>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었다. 어른 보기에 그냥 꼬맹이지만 스스로 알 것 다 안다 생각하는 주인공을 다룬 성장기였다. 제목 때문인지 12살은 어쩐지 다른 의미로 다가오네. 2018년을 맞아 12살 딸을 보는 감상을 추억과 버무려 엄마에게 얘기했더니 이렇게 분위기를 깨더구나.

"미국 나이로 12살이면 우리 나이로 13살 아닌가?"

따지고 보면 말은 맞지. 아빠 추억과 딸이 한 살 더 먹은 의미를 한 번에 날릴 정도로 대단한 사실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늘 그렇듯 올해도 응원한다.



# 검도

운동 부족을 걱정해 시작한 검도가 나름 재밌나 보구나. 칼 없이 기본동작을 하며 '머리'를 외치는 모습이 멋졌다. '조선제일검'은 됐고, 살면서 한 번쯤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재주 정도는 됐으면 좋겠다.

"아빠, 검도장에서 이번에 눈썰매장 간데요."

당분간 검도가 싫을 일은 없겠다.



# 무술년

"아빠, 올해는 무술년이니까 술 먹지 말기."
"왜? 없을 무, 술 술이라서?"

말길 잘 알아먹는 아빠라서 좋지? 그래도 그냥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무한대로 술을 마시는 해 아닐까?"

아주 콧방귀를 제대로 뀌는 모습이 우습더구나. 진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표정도. 세련된 제안을 뭉개는 게 못마땅하더냐? 얘야, 정작 더 중요한 사실은 아직 정유년이다!



# 장갑

눈썰매장에 가는데 마땅한 장갑이 없다고? 구매 계획과 퇴근 뒤 동선까지 완벽하게 준비한 엄마는 정작 퇴근 카드를 찍고 모든 절차를 잊었다는구나. 아빠에게 딸 장갑 셔틀을 하라더라. 비뚤어진 중년으로서 너에게 한마디 남겼지.

"핑크색에 공주 그림 그려진 장갑 사야지."
"아빠, 장난해? 검정 아니면 흰색. 단색으로."
"더 예쁘게 말해야지. 부탁하는 주제에."
"사주세요."

그래, 원하는 게 있을 때는 숙일 줄도 알아야지. 세상이 그렇게 만만찮다. 옅은 하늘색에 맵시가 세련된 방수 장갑을 받고 만족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 비기

검도 같이 배우는 언니에게 벌써 비기(?)를 전수받았다며? 지역대회 우승 경력도 있는 고수라고.

"먼저 움직이면 안 된다던데.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상대가 공격하면 그 공격에 맞춰 역으로 공격하면 된데."

그러니까 그게 말처럼 쉽냐고. 말하는 거 보니 고수는 분명하구나.

"참! 아빠가 전에 얘기한 것처럼 '머리' 외치고 허리 때리면 점수 안 준다던데."

기억나지 않았단다.



# 치킨

치킨에 감히 하느님을 붙여 부르는 이름이 '치느님'이란다. 인간에게 하느님보다 치킨이 내리는 은혜가 더 살가운가 보다. 엄마 없을 때 치킨이란 네 식사와 아빠 안주를 살뜰하게 해결하는 은혜잖아. 하느님이 더 분발해야겠다.

"예지, 치킨 먹으면서 특별히 좋아하는 부위 있어?"
"아니, 그런 거 없는데."

정색하면서 그런 게 없다고 하니 그런 줄 알겠다만 왜 다리뼈와 날개뼈가 네 앞접시에만 쌓이는지 궁금했다. 치킨을 집을 때마다 살짝 뒤적거리는 것도 수상했고. 아빠야 뼈 발라먹는 거 귀찮다만.



# 간지

검도를 배운다니 같은 반 친구가 간지 난다 했다고? 이제 막 스텝을 배우는 중인데도 말이다.

"간지 나려고 검도 배우는 게 아닌데."

그래, 그렇게 말해야 엄마 딸이다.

"예지, 그래도 이왕 하는 거 간지 나는 게 더 좋지 않아?"
"당연하지."

그렇게 말해야 아빠 딸이다.



# 견제

아빠 음주를 향한 견제 강도가 세지는 듯하다. 오죽하면 아빠가 술 마시고 뭐 잘못한 게 있느냐고 되물었겠니. 엄마가 견제하니 따라 견제하는 게 아닌가 싶더라.

"잘못한 건 없지만 조금 귀찮게 하기는 하지."

그거야 밖에서 술을 제법 마시고 들어왔을 때고. 집에서 맥주나 와인 한 잔 반주로 곁들이고 하는 짓은 아니지. 어쨌든 이쯤에서 너에게 확인해두는 게 좋겠다.

"술 마실 때만 귀찮게 하는 게 좋아, 평소에도 늘 귀찮게 하는 게 좋아?"

답은커녕 아예 콧방귀를 뀌더구나. 질문이 말도 안 된다면서. 이제 이 정도 수작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 가성비

"아빠는 참 그럴듯해."

뭐지? 말투에서 뭔가 좋은 뜻일 수는 없다는 것을 예감했다. 불길했지만 그렇다고 내용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요리를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닌데 그냥 잘 하는 것처럼 보여."

혹시 가성비가 높다는 말 아니니?



# 재능과 노력

"재능이 이겨요, 노력이 이겨요?"

느닷없는 질문이 종종 대견하다. 준비되지 않은 흔한 아빠라면 당황하면서 검색이나 하겠지만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노력이 극복하지 못하는 재능이라는 게 있어. 1만 명 중에 한두 명 있겠지. 하지만 3등부터 1만 등까지는 노력으로 모두 극복돼. 아마 1만 명 중에 3000명 정도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할 텐데 걔들이 모두 노력에게 져. 어떤 면에서 노력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재능 가운데 최고일 수도 있어."

뭔가 생각이 뚫렸을 때 환해지는 네 표정은 언제 봐도 흐뭇하다. 그리고 네 질문에 대답하는 게 아빠 재능이란다.



# 표현

"이건 완전 노가다야."

단순 계산 문제가 가득한 문제집을 펼치며 말하더구나. 문제를 보여주며 동의를 구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예지, 노가다 해봤어?"
"아니."
"그러면 지금 네 말은 노가다로 돈을 버는 분께 실례일 수 있어. 아빠가 보기에는 노가다보다 계산 문제 푸는 게 훨씬 쉬워."

매정했니? 네가 힘들다는 것을 다른 사람 일을 깎아내리면서 증명할 필요는 없다.

"아빠, 이 계산 문제 푸는 거 먹지도 않을 사탕 껍데기 50개를 계속 까는 것 같아."

훨씬 세련되고 와닿는 표현이구나. 진짜 지겹고 힘들겠다.



# 선물 효과

마우스로 그림을 그리며 세밀한 표현에서 막힐 때마다 아쉬워하던 네가 늘 마음에 걸렸다. 생일을 맞아 노트북에 연결하는 태블릿과 펜을 선물했지. 컴퓨터 도매상가에서 태블릿을 구입하니 너무 좋아 입꼬리가 치솟고 심지어 눈가마저 조금 촉촉해지더구나. 오히려 당황했다.

"필압이 느껴져서 너무 좋아요."

최근 며칠 동안 엄마 대비 아빠 영향력이 부쩍 늘었다는 것을 체감한다. 선물은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완전 거짓은 아니었구나. 효과가 며칠만 더 갔으면 참 좋겠다.



# 리허설

엄마는 네가 뭐 잘못하면 아빠에게 먼저 하소연할 때가 있다. 아빠는 움찔해서 네 변명부터 하게 되더구나. 때로는 내가 왜 눈치를 보나 싶을 때도 있다. 나중에 네가 더 심하게 당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그런데 막상 너를 앞에 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네 엄마는 참 조곤조곤 상냥하게 얘기하네. 논리도 완벽하고. 아까 아빠가 네 편드느라 했던 얘기를 응용하며 네 마음도 잘 안다면서. 좋은 엄마 코스프레는 이런 철저한 리허설 덕 아닌가 싶다.



# 사회형

처음 만난 사람과 선뜻 친해지지 않는 성격이 스스로 아쉬운가 보구나. 엄마에게 사교성이 부족하다며 하소연했다고. 엄마와 아빠는 네가 1년에 두 배씩, 그러니까 태어났을 때보다 2의 12 제곱만큼 사교성이 나아졌다고 보는데. 엄마는 그런 성격이 지닌 장점을 설명하며 너를 북돋우려 하더라.

마침 학교에서 보낸 'Holland형 진로발달 탐색검사 결과표'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현실형 △탐구형 △예술형 △사회형 △설득형 △관습형 가운데 현실, 탐구, 예술, 사회 부문 점수가 높더구나. 특히 사회 부문 점수가 높아 설명을 읽었더니 '타인을 도와주고, 치료하고, 가르치고, 봉사하는 활동 등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돼 있더라. 엄마와 아빠 판단이 맞잖아? 너도 이 수치에 은근히 만족하는 표정이었다고 들었다.

그나저나 관습 부문 점수가 아주 낮던데 이런 설명이 붙어 있더라. '원칙과 계획에 따른 체계적인 작업을 좋아하며, 사무능력과 계산능력이 뛰어나다'. 그래, 산수가 안 되는 이유도 확인했다.



# 사춘기와 갱년기

"엄마, 갱년기 엄마와 사춘기 딸이 싸우면 갱년기 엄마가 이긴다던데?"
"당연하지."

정다운 분위기와 달리 내용이 살벌해 웃음이 나왔다. 너와 엄마는 마치 고래 싸우다가 새우 보는 눈으로 쳐다보더구나. 마지막 남는 사실은 아빠 전투력이 최하라는 거지. 작은 소망이 있다면 그 갱년기와 사춘기가 제발 겹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 여파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게 없다고 굳이 회사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해서 징징거렸다며. 그럴 나이는 지난 듯한데 말이다. 딱히 해결 방법이 없던 엄마는 징징거리는 것조차 꽤 거슬렸나 보더라. 그런 행동은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엄마는 그런 방식을 또 유난히 싫어한단다. 무엇보다 그 불똥이 돌고 돌아 아빠에게 튄다는 게 가장 큰 문제지. 마치 너는 왼쪽 회전을 주고 앞에 공 절반을 맞혔을 뿐인데 그 공이 돌고 돌아 구석에 있는 아빠, 아니 빨간 공을 때리는 당구처럼 말이다.

"예지, 앞으로 무슨 문제 있으면 아빠에게 전화해. 엄마에게는 자랑할 거 있을 때만 전화 하고."

일단 이렇게 버텨보자.



# 휴식

숙제도 하기 싫고, TV도 보기 싫고, 책도 읽기 싫고, 그냥 쉬고 싶다는 네 마음을 엄마도 아빠도 충분히 이해했다. 잘 쉬었니?

"예지, 잘 쉬었어?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안 했어?"
"뭐가 달라?"
"잘 쉬었으면 그 다음에 뭘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겠지. 아무것도 안 했으면 그냥 아무 것도 안 했을 뿐인 거고."
"잘 쉬었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기어이 못 듣겠나 보구나. 엄마 닮아가지고.



# 도용

"아빠, 도용이 뭔지 알아?"

잘 안다. 아빠 일하는 곳이 도용에 매우 예민하다. 다른 사람 그림을 베껴 그리면서 마치 자기 그림인냥 내세우는 짓 때문에 또래끼리 문제가 됐나 보구나. 그렇다면 도용은 왜 할까?

"실력을 키우려는 노력 없이 많은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종종 네 통찰에 감탄한다. 그건 그렇고 너는 왜 도용을 하지 않니? 노력 이상으로 칭찬받고 싶은 마음은 본성에 해당하는 영역일 텐데.

"들키면 저격당하거든."

도용을 알아챈 네티즌이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게 저격인가 보구나. 그렇다면 네 성격에 도용은 어렵겠다. 하지만, 한 가지만 짚고 싶더구나. 도용하는 마음과 저격하는 마음은 그다지 차이가 없다는 거.

"나는 도용도 싫고, 저격도 싫어. 그냥 내 그림을 잘 그렸으면 좋겠어."

그래, 응원한다.



# 상담 요령

선생님이 묻더구나.

"아버님, 따님이 요술램프가 있으면 숙제하지 않고 공부 잘했으면 좋겠다고 하던데 아버님은 딸에게 뭐라 하시겠어요?"

별 주저 없이 아빠도 일하지 않고 돈을 벌면 좋겠다고 얘기했을 것이라 답했다. 상담 선생님이 웃으며 네 엄마에게 말하더구나.

"어머님,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시겠지요?"

엄마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라. 도대체 뭐라 했기에?

"나? 예지야, 너무 거저 먹으려는 거 아니야?"

뭐 잘 모르겠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다만 상담 선생님이 그랬단다. 아버님 잘 하신다고.



# 남북정상회담

한국 현대사를 4분 34초 만에 말끔하게 정리하며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의미를 전하자 너는 뜻밖에도 새초롬한 표정을 짓더구나. 2007년 생인 네 얼굴에서 무슨 감회 같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만.

"진짜 답답해. 그냥 솔직하게 만나서 사과하고 화해하고 통일하면 되는데. 이렇게 만나면 되는데 지금까지 뭘 했는지 모르겠어."

못난 어른을 대표해 사과하마. 너는 평화와 번영이 넘치는 나라를 자랑스러워 하며 사는 날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 심부름 노조

"바빠서 예지에게 카레에 넣을 고기, 채소를 심부름시켰는데 잘 사 왔네. 진짜 대단하지 않아?"

엄마 목소리가 살짝 들떴더구나. 천 원 몇 장 쥐어 주며 네 먹을 간식을 사러 보낸 적은 있다만 신용카드 결제까지 해냈다니 기특하다. 칭찬받는 표정을 보니 사뭇 건방지더라. 그나저나 이제 더 어려운 심부름이 가능해졌다며 흐뭇해하는 엄마 자본가 표정을 보니 둘이서 노조를 꾸려 맞서야겠다. 잊지 마라. 흩어지면 죽는다.



# 전문가

신체 변화와 아울러 부쩍 투정과 짜증이 늘었는데 적확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몇 주 전 엄마가 전문 심리상담을 한 번 받는 게 좋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동의한 이유다. 500문항이 넘는 설문을 작성할 때는 살짝 후회도 했다. 엄마가 아빠보다 설문 항목이 많지 않았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엄마, 나 상담 잘한 것 같아. 엄마랑 아빠도 내 얘기를 잘 들어주고 좋은 얘기 많이 하지만 상담 선생님과도 많은 얘기를 해서 좋아."

엄마는 만만찮은 비용을 잠시 잊을 정도로 울컥했다더라. 아빠는 부모님께서 아이 얘기를 참 잘 들어주고 대화를 잘하신 것 같다는 상담 선생님 말만 기억나는구나. 기술적인 면에서 아빠가 엄마보다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지? 무엇보다 네가 투정과 짜증이 눈에 띄게 줄고 웃음이 많아졌으며 자기표현에 자신감이 더 붙은 듯해 참 좋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



# 제약

"김영란법 때문에 스승의 날 선물도 못해서 섭섭해. 학생들이 꽃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냐?"

법은 지킬 사람보다 지키지 않을 사람을 겨냥하기 마련이다. 지키지 않을 사람 때문에 만든 법으로 지킬 사람이 힘들고.

"1분단부터 4분단까지 파도타기 응원하면서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면 어때? 엄지 하트부터 시작해서 반 애들이 점점 크게 하트를 만들어서 선생님 사랑한다 해도 괜찮을 것 같고."

꼭 돈을 들여 뭘 살 필요는 없잖아?

"아빠, 좋은 생각인데 우리 반이 그렇게까지 잘 단합하지는 않아."

어쨌든 살면서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제약이 아니다. 제약 때문에 뭔가 할 수 없다는 생각이지. 기억해다오.



# 철듦

학교에서 겪는 수컷, 아니 남학생들이 저지르는 철딱서니 없는 짓을 전해 들으면 어이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아빠 역시 그 어리석은 남학생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거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예지야, 사람이 철든다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어른이 돼도."
"진짜? 아빠는?"
"엄마 만나고 조금, 아주 조금 나아졌지."

뭔가 가닥을 잡으려는 네 표정은 아주 마음에 들었으나 씨익 웃는 네 엄마 표정은 어쩐지 거슬렸다.



# 추리

휴대전화가 보이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는 것까지는 참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라 했더니 시도도 않고 모르겠다는 태도는 못 보겠더라. 2G 폰이라고 무시하니? 어제 네 동선과 행동, 마지막 기억 등을 드라마에 나오는 못된 검사처럼 캐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 저녁에 외식할 때 가지고 나갔고."
"어떻게 알아?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폰으로 사진을 본 기억이 나."

주차장으로 함께 향했다. 네가 탔던 자리를 뒤져보라 했지. 몸을 쑥 집어넣는 속도가 한 번에 찾았구나 싶더라. 조금 전까지 징징거리던 너도, 괜히 너를 몰아붙인 아빠도 서로 민망해서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우리 셜록과 왓슨 같았니?



# 얼굴

"얼굴이 크다는 기준이 뭐야?"

아빠 어릴 적부터 아주 좋은 기준이 있다.

"손을 쫙 펴서 얼굴에 댔을 때 얼굴이 손보다 크면 얼굴이 큰 거고, 손보다 작으면 작은 거지."

그러면 10명 중 8~9명은 제손을 얼굴에 갖다대더라. 얼굴에 올린 손을 탁 치는 것으로 '자기 손으로 자기 얼굴 때리기' 이벤트는 끝난다.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짓더니 곧 깔깔거리며 넘어가는 네 모습에 뿌듯했다.



# 취침

"어른은 늦게 자도 되고 어린이는 일찍 자야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해."

형평성을 고민하는 게 시민이 되는 첫걸음일 테다. 그래도 비교는 공평한 조건에서 해야지. 어른인 엄마와 아이인 너를 바로 비교하면 되겠니. 엄마 어린이 때와 지금 너, 아니면 지금 엄마와 어른이 됐을 때 너를 비교해야 맞는 거 아닌가?

"아빠 어렸을 때는 9시 되면 TV에서 자라고 했는데, 너는 그 정도는 아니잖아. 네가 훨씬 낫네 뭐."

"그게 아니라 어른도 일찍 자면 몸에 좋다는 거지."

그다지 진심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 안약

"흑흑. 너무 슬퍼."

얼굴을 타고 흐르는 굵은 눈물방울을 보고 움찔했단다. 아침부터 도대체 무슨 일이니!

"에구, 잘못 넣었네."

그제야 네 손에 작은 안약병이 눈에 띄었다. 고개를 젖혀 치켜뜬 눈에 안약을 몇 방울 떨어뜨린 너는 다시 대사를 치더구나.

"아빠, 너무 슬퍼."

또르르 뺨을 타고 내리는 물방울이 그럴듯했다. 누구나 안약 넣으면 한 번쯤 그 연기는 하고 싶은가 보다.



# 하이파이브

집으로 들어오는 너를 손바닥을 내밀며 반겼다. 하이파이브는 친근한 부녀에게 익숙한 인사 방법 아니겠니. 멀리서 손바닥을 쭉 펴며 다가오는 걸음이 어찌나 사뿐사뿐하던지.

"내가 이겼다."

이겨? 아빠 손바닥 바로 앞에서 네 손바닥은 이미 '가위'로 바뀌어 있더구나. 씩 웃으며 휙 돌아서는 네 발걸음이 참 짓궂었다. 가위로 바꾸는 순간에 맞춰 바위로 대응하지 못해 아쉬웠고. 다음에는 만만찮을 것이다.



# 아침인사

일찍 일어난 네가 슬며시 다가오길래 아침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사랑하는 딸."
"첫 번째는?"

옆에 누워 있는 엄마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지.

"엄마 자니?"
"응."
"그러면 예지가 첫 번째야."

비웃는 듯하면서 싫지 않은 마음이 섞인 묘한 표정이 너무 재밌었다. 오늘도 하루를 즐겁게 시작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만 엄마가 다 들었다며 일어나더구나. 애써 곤란한 표정을 지었더니 네 반응이 더 웃겼다.

"그러게 아빠, 왜 그랬어."



# 연상

"아빠, 나는 한두 살 많은 언니들과 놀 때 좀 더 편한 것 같아."

또래보다 조금 성숙해서 그럴 테다. 네가 배려하는 만큼 배려받지 못할 때 그런 마음이 더 들지 않니? 언니들은 아무래도 친구보다 너를 배려할 테니 마음이 편할 수밖에.

"그 마음 누구보다 잘 알지. 그래서 아빠는 아예 그런 사람과 살잖아."

마주앉은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보며 갸웃하는 모습이 잠깐 우스웠다.

"엄마가 아빠보다 나이 많다는 얘기야."

해석하는 엄마 목소리에서 아주 약간 살기를 느꼈다.



# 플랭크

"아빠 나 좀 봐."

플랭크 자세구나. 그런데 엉덩이가 그렇게 올라오면 안 되거든. 몸이 일직선이 되는 게 중요하단다. 그래서 엉덩이를 살짝 눌러줬을 뿐인데, 철퍼덕!

"왜? 힘들어?"
"아니, 아빠가 누르니까 간지러워서."

자세를 다시 잡더구나. 이번에도 엉덩이가 올라오네. 배를 받치고 몸을 일직선으로 바로잡아 줬지. 손을 빼니 다시 철퍼덕!

"왜? 잘 안 돼?"
"아니, 아빠가 배를 만지니까 간지러워서."

그러니까 힘들다, 잘 안 된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힘든 거니?



# 반올림

하루에 수학 문제집 두 바닥 풀기는 네가 먼저 한 약속이다. 셈이 더뎌도 학원 돌리기는 못하겠고, 5학년이면 5학년 문제는 풀었으면 해서 함께 논의한 끝에 정한 목표지. 요즘 통 문제 푸는 모습을 보지 못해 물었다.

"예지, 수학 하루에 두 바닥씩 풀어?"

순간 눈동자가 흔들리더구나. 살짝 굳은 표정으로 대답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단다.

"며칠 정도 건너뛰었니?"
"일주일 정도?"
"약속 지키려면 밀린 거 어떻게 해야 할까?"

무작정 나무라지 않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게 하는 이런 교육은 언젠가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잠깐 셈을 하던 네가 해결책을 제시하더구나.

"일주일 안 했으니까 일단 열 바닥에..."
"잠깐, 예지. 하루 두 바닥에 일주일이면 열네 바닥이지."
"아니, 반올림하면."

그 힘들어하는 수학을 이럴 때는 야무지게 써먹는구나. 반올림이라니!



# 반깁스

발목에 반깁스를 하게 됐구나. 길에서 폴짝 뛰다가 발을 헛디뎠다고. 뼈나 인대에 큰 이상은 없고 조금 접질린 정도라니 다행이다.

"아니,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다가 그런 것도 아니고 뭐야? 혼자서 바보같이."

"아빠는 참, 누가 일부러 그랬어? 나도 힘들다고."
"힘들어? 엄마, 아빠 마음은 그냥 무너진다, 무너져."

한없이 속상한 것은 진심이다. 하지만, 마음 깊은 쪽 어느 한구석에서는 피서나 외출 청탁을 당분간 피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스멀스멀. 아빠가 그랬잖아. 다 가지라는 법도, 다 잃으라는 법도 없다고. 어서 낫거라.



# 글씨

"아빠 글씨 이쁘네."

칭찬이 훅 들어와서 잠시 당황했다. 사실 아빠는 필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거든.

"아빠 글씨 별로인데."
"그 정도면 됐지. 나 요즘 글씨 슬럼프라서 막 써."

'글씨 슬럼프'라는 말이 꽂혔다. 더 예쁘게 쓰고 싶은데 생각처럼 모양이 나지 않는 시기가 종종 있거든. 해결책도 잘 찾았구나. 막 쓰다 보면 또 마음에 드는 글맵시가 나올 때가 있더라.

 

# 신뢰

방학에 수학 문제집 두 바닥씩 하는 게 나름 버거웠나 보다. 다섯 자릿수와 두 자릿수 나누기를 아주 깔끔하게 과정 없이 답만 적었더라. 끝까지 스스로 풀었다고 버텨서 오히려 조금 놀랐다. 일제 강점기였다면 꽤 쓸만한 독립군이었겠구나 생각했단다.

"답지 봤고요. 속여서 미안해요."

한 번만 더 우기면 믿어 주겠다고 하니 잠깐 망설이다가 고백하더구나. 오늘 아빠가 한 말은 잊지 말기 바란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실망하는 게 싫어 거짓말할 수도 있지. 얼마든지. 그래도 오늘처럼 자꾸 물어봤던 것은 결국 네 입으로 진실을 듣고 싶어서거든. 언젠가 한 번은 세상 사람 모두 너를 의심하고 오해하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 그때 최소한 아빠 한 명쯤은 너를 믿어야 하지 않을까. 그걸 잃을 바에는 수학 바보가 되는 게 훨씬 낫다."



# 신과 함께

"아빠, 천 년 전에 나 때린 적 있지? 엄마는 천 년 전에 나를 얼마나 괴롭혔을까."

영화 <신과 함께> 감상을 그렇게 정리하는구나. 그래, 우리가 죄를 지어도 큰 죄를 지었나 보다.



# 싫어

"아빠는 왜 내가 싫어하는 말만 해?"

깐죽거리는 아빠를 견디다 못한 네가 하소연했잖아.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싫어하는 말만 한다고? 아빠 말할 때마다 싫은 게 아니라?"

그건 분명히 아니라며 끝까지 선을 그어 고마웠다. 하지만, 곧 그리 될 것이라는 것도 안다. 물론 아쉬울 테지만. 그래도 너에게 장난치면 재밌는데 어쩌니.



# 득템

식탁 위에 1000원 한 장과 동전이 있기에 모두 너 가지라며 이렇게 말했지.

"득템했네."
"아니, 엄마가 나 쓰라고 줬는데."

그러니까 기본 장비라는 말이냐? 지갑에서 1000원을 꺼내 건네며 다시 말했다.

"이러면 득템이지?"
"히히, 고맙습니다."

배시시 웃는 모습에 역시 삶이라는 게임에서도 소소한 기쁨은 기본 장비보다 득템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확인했다.



# 밀땅

술 한 잔 하고 들어온 아빠 양손을 꽉 잡더니 앞뒤로 우악스럽게 막 흔들더구나. 휘청거리면서 물었다.

"뭐 하는 거야?"
"밀땅!"

느닷없이 설레었다.



# 어필

개학이구나. 학교 가는 길에 실내화를 새로 사기로 했다고. 얼마쯤 하느냐는 네 질문에 엄마는 3000원 정도 예상했다네.

"엄마, 3000원 아냐. 7000원이야. 내가 돈 더 안 들고 갔으면 어쩔 뻔했어? 이제 나 1000원 남았어."

실내화를 사자마자 너는 전화로 엄마 실수를 지적하고, 네 준비성을 자랑했으며, 부족한 용돈까지 어필하는구나. 장하다.



# 기본

"친구들처럼 입시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전공을 정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입시 준비? 전공? 엄마·아빠 모두 언급을 꺼리는 그 단어를 왜 네가 먼저 꺼내는지 잘 모르겠다. 12살이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정한 게 없는 만큼 가능성이 될 테니.

"네가 지금 무슨 운동을 좋아하는지, 앞으로 무슨 운동을 좋아할지 몰라도 이거 세 가지는 무조건 길러야 해. 이 세 가지만 기르면 무슨 운동을 해도 평균 이상은 하지. 스피드, 힘, 지구력."
"기본?"

종종 설명 속도보다 이해 속도가 빠를 때마다 감탄하는 거 아니?

"그러면 지금 나한테 기본은 뭐야?"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힘을 길러주는 수학, 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고 상대 생각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국어, 다른 세계 지식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외국어,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독서."

뭔가 알아들었을 때 반짝 빛나는 네 얼굴은 언제 봐도 반갑다. 물론 내일부터 너는 액체 괴물을 조물 거리고 유튜브를 뒤지다가 그림을 긁적거리면서 예능 재방송을 보겠지만 말이다. 그 또한 그렇게 나쁘지 만은 않을 테다.



# 동아리

독서 동아리를 만들었잖아. 저녁에 식탁에 마주 앉아 5분씩 소리 내어 책 읽어 주기.

"어떤 책을 골라?"
"읽고 싶은 거나 읽어 주고 싶은 거."

낭랑하고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 클리오나 이야기도 재밌었고. 쥐스킨트 아저씨가 쓴 이야기는 어땠니?

"엄마도 가입시켜."
"내가? 왜?"
"네가 회장이거든."
"내가? 풉!"

어이없어 하면서 싫지 않은 표정이 우스웠다.



# 비밀

뒤에 앉은 남학생이 울었다고? 자기 좋아하는 여학생을 한 친구에게 얘기했는데 그 자식이 나불거렸다며. 참 나쁜 녀석이다. 울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만 그 속상한 마음은 이해가 된다. 상대 마음이 항상 내 마음 같은 게 아니기에 확인하기 전에 노출되는 것 자체가 힘들 수 있거든.

"에휴, 난 좋아하는 친구 생겨도 다른 사람에게 말 안 할 거야."

그러려무나. 그리고 잊지 마라. 세상에 세 명이 아는 비밀은 없단다.



# 공유 자전거

자전거 구입 요청을 그동안 거절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늘 타고 다닐 일이 없으며, 그렇다면 목돈을 들여 거추장스럽게 자전거를 집안에 둘 이유가 없다. 탈 것은 꾸준히 타고 관리하지 않으면 금방 애물단지가 되거든. 자전거를 타고 싶으면 집 근처 강변 산책로에서 빌려 타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고마웠다. 그런데 약속하고 처음으로 찾은 자전거 대여소가 하필 휴무일 줄이야.

"실망이야."

서너 걸음 앞서 걸으며 먼 곳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란다. 혹시나 해서 받아둔 공유 자전거 앱으로 주변을 검색했지. 마침 놀랍게도 집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공유 자전거 한 대가 딱!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앱을 열어 QR코드를 읽는 순간 잠금장치가 찰칵 풀리더구나.

"오! 오! 오! 우왓! 아빠 최고!"

금방 사라지는 노란색 자전거를 설레는 마음으로 한참 쳐다봤다. 바람은 또 어찌나 상쾌하던지.



# 장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찾는 네 낙관은 언제 봐도 좋다. 잘못을 하면 앞뒤 사정을 살펴 시간이 지나서라도 사과하고 상황을 다시 정리하는 습관 역시 대견하다. 어른조차 쉽게 지닐 수 없는 품성이거든. 자라면서 잘 간직하기 바란다. 모처럼 세게 야단친 김에 네 장점을 곱씹어봤다.



# 선생님

비가 옆으로 몰아칠 정도로 바람이 드센 태풍을 배경으로 갑자기 피아노를 쿵쾅 치더구나. 자꾸 실수가 나오는 이유는 태풍으로 불안해진 마음 때문이니? 뭐 그렇다고 치자.

"나중에 피아노 잘 치면 아빠도 좀 가르쳐 줘."
"왜? 내가 선생님도 아닌데."
"선생님이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이 선생님이야. 배울 게 있다면 동생이든 친구든 딸이든 후배든 선생님이지."

움찔하는 거 봤다. 대인의 풍모가 느껴지던?



# 긴장

아내 갱년기와 딸 사춘기가 겹치면서 위기는 DMZ가 아니라 우리 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 최근 네가 엄마와 티격태격할 때면 아빠 평화는 위태롭고 또 위태롭단다.

"네가 엄마와 말다툼하면 아빠는 누구 편들어?"

한참 말이 없기에 오히려 놀랐다. 평소 네 성정이라면 아빠가 판단하라고 할 줄 알았거든. 살짝 한숨을 쉬더니 답하더구나.

"내 편을 들면 좋지. 하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잖아."

네가 '무조건 내 편'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그럴 수 없다는 말에서 양심도 엿보였고. 이제 평화 사절단은 엄마에게 물어보러 간다.



# 공적

공적(公敵)이 내부 결속력을 강화한 사례는 인류사에 차고 넘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친구와 벌이는 갈등이 꽤 반가웠다. 싸움은 피하는 게 좋다만 이왕 시작했다면 이기는 게 좋지.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걔가 또 따지면 어떡해?"
"네 할 말만 차분하고 야무지게 하고 딴 데 쳐다보면서 상대도 하지 마. 걔는 열불이 나서 아마 속이 터질 걸."

사춘기와 갱년기로 소강상태이던 모녀관계가 공동전선을 펼치며 회복하는구나. 아울러 네 엄마는 싸우면 참 피곤한 상대라는 것도 다시 확인했다.

 

# 독서

시간 맞을 때마다 함께 번갈아 소리 내어 책 읽는 시간이 참 좋단다.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면 대놓고 짜증내는 네가, 책을 읽다가 어렵게 느끼는 구절을 딱 네 수준에 맞게 풀어주면 또 그렇게 좋아하니 보호자로서 참 벅차구나. 이 시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으나 이미 겪은 시간마저 고맙고 또 고맙다는 거 아니?

"아빠, 오늘은 여기까지."

16분, 딱 좋구나!

 

# 역사

최근 시험을 쳤나 보구나. 결과? 그렇게 궁금하지 않단다. 좋으면 자랑할 것이고 좋지 않으면 생략할 것이니. 그나저나 답이 애매했는지 엄마에게 물었다고?

"고구려, 신라, 백제 있잖아. 발전 순서가 어떻게 돼?"
"글쎄, 백제-고구려-신라인가? 고구려-백제-신라인가?"
"그래? 고구려를 제일 뒤에 적었는데."

어차피 답은 아니겠구나. 침대에 굴러다니는 '고구려 시대' 역사 만화는 반성이니, 반항이니? 네가 화랑을 '미소년들이 모여서 뭐 하는 거'로 정의하더라는 얘기를 듣고 웃겨 쓰러지는 줄 알았다.



# 거짓말

시작은 네 친구 엄마가 네 카톡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는 고발(?)이었다. 카톡을 엄하게 단속하던 엄마 요원은 조사에 착수했지. 너도 급했나 보구나.

"친구에게 계정 빌려줬어."

하필 그 옆에 개인 정보 관리에 예민한 아빠 요원이 앉아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평소와 다르게 아주 격앙된 목소리로 허술한 계정 관리를 나무라는 아빠 앞에서 아주 쩔쩔매더구나. 잠깐 타임을 요청하며 엄마와 잠시 따로 이야기할 시간을 달라기에 받아들였다. 방에서 심문(?)을 마친 엄마가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지.

"카톡 했다고 혼날까 봐 급한 김에 둘러댔대. 계정 빌려주지 않았고 자기가 몰래 컴퓨터에 설치해서 썼다고 하네. 방에서 아빠에게 뭐라 설명하고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고민하라 했어."

주눅 든 얼굴로 나온 너는 거짓말부터 사과했다. 친절한 아빠는 예를 들어 네 어리석음을 진단했지. 콜라 많이 마신다고 뭐라 했는데 콜라 안 마시고 술 마셨다고 한 꼴이라고. 이왕 거짓말을 하려면 덜 혼나는 쪽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아니니? 어쨌든 거짓말은 미안하고 개인 계정 관리는 더 철저하게 하겠다는 네 약속을 믿기로 했다.

"이예지, 이제 엄마에게 와 봐."

본격적으로 시작이구나. 참고로 엄마 요원은 아빠 요원보다 훨씬 집요하고 무섭단다. 건투를 빈다.



# 용돈

"아빠, 나 용돈을 많이 쓰지 않는 게 너무 어려워."

네 말이 더 어렵구나. 용돈 많이 쓴다는 말이잖아. 전형적인 엄마 말투더라. 돈 쓸 때는 좋지만 돈이 마르니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싶었겠지. 일단 이유부터 듣자.

"친구가 뭐 사 달라면 사 주고, 학교 다녀와서 또는 학원 갈 때 간식을 사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용돈을 아껴 쓸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너 하루에 얼마씩 들고 다녀?"
"5000원 정도."
"2000원만 들고 다녀. 돈은 없으면 못 써."

뭔가 깨우칠 때 네 표정은 언제 봐도 좋다. 자세한 경제 얘기는 나중에 하자. 일단 씀씀이부터 줄여야겠으니.



# 비교

사회 시험 문제를 많이 틀렸다고. 굳이 너보다 더 틀린 친구 점수와 같이 전하며 자기 방어를 폈더구나. 너보다 더 맞춘 친구가 훨씬 많을 게 분명한 점수던데 말이다. 기어이 엄마에게 한 방 먹었다고.

잊지 마라. 네 부모가 원하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잘하는 게 아니다. 어제 너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견줘 성실하지 못했던 너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된다.

 

# 기회비용

엄마 벼슬아치가 아빠에게 빵이나 간식 심부름을 시키면 될 수 있으면 너에게 넘기려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라면 그 정도 거래는 할 줄 알아야지. 그러니까 순전히 교육 과정이란다. 보통 1만 원을 주며 네 먹고 싶은 거 알아서 사라 하잖아. 처음에는 엄마 벼슬아치가 주문한 식빵과 아울러 젤리, 쿠키 등 최대한 돈에 맞춰 평소 먹고 싶은 것을 사더구나. 아빠는 잔돈을 심부름 값이라며 용돈으로 줬지. 그렇게 몇 차례 경험에서 너도 느끼는 바가 있었니?

"오늘은 뭐 샀어?"
"식빵이랑 쿠키 하나."
"잔돈은?"
"잔돈? 3500원."
"그거는 심부름값, 예지 용돈."
"고맙습니다."

간식 일부를 포기하고 용돈을 챙기는 선택, 나쁘지 않다.



#인권 감수성

"아빠, 나 오늘 콘셉트가 블랙이야."

양말부터 바지, 셔츠, 머리 고무줄까지 검정색으로 맞췄구나. 얼핏 봐도 괜찮은 감각이다.

"깜지네, 까만 예지."
"강아지 이름 같은데 그냥 깜둥이라고 하지. 내 태명이 '둥이'였다며."
"피부가 검은 친구들을 비하하는 표현이잖아. 의도는 아니더라도 결과가 그렇다면 쓰지 말아야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기에 안심했다. 아빠에게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이런 인권 감수성은 오래 기억하기 바란다.



# 퀸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나오던 너는 발 두 번 구르고 손뼉 한 번 치며 말하더구나.

"우리 반 친구들도 이 노래 알던데."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이 밴드는 위대하다.



# 책거리

저녁에 시간이 맞으면 함께 책 읽기로 했지. 10~20분 번갈아가며 소리 내 읽는 게 규칙이었다. 326쪽에 이르는 교양 책을 한 달 넘게 걸려 읽었구나. 너도 나도 대견하다. 가장 큰 고비는 술 마시는 아빠 탓에 건너뛰는 날이 많았다는 거? 꾸준히 진행했다면 2~3주 정도에 가능했겠지.

"예지 덕에 읽기 쉽지 않은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어."
"아빠가 어려운 얘기를 쉽게 설명해줘서 좋았어."

덕담 주고받는 매너도 훌륭했다. 기브 앤 테이크! 살면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지혜다. 다음에는 이야기 자체가 아주 재미있는 얇은 책을 고르자.



# 좋은 친구

홀로 자라 외롭고 천성이 모질지 못한 데다 속을 쉽게 드러내지 않기에 친구 관계가 늘 어렵다는 것은 안다. 친구 마음이 네 마음 같지 않고, 네 마음이 또 친구 마음 같지 않겠지.

"아빠,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야?"
"너에게 잘해주는 친구가 아니라 네가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친구."

주저 없는 답에 놀랐니? 아빠도 가끔 놀란다.



# 호흡

검도장으로 출발할 때까지 저녁을 챙겨주지 못할까 싶어 걱정했다. 집 도착 직전까지 차는 어찌나 막히던지. 일단 급하게 전화로 미션을 줄 수밖에 없더구나. 예지 출발 18분 전, 가까스로 도착한 아빠는 부엌으로 직행했다. 가스레인지 옆에 라면 한 봉지, 물 1리터, 계란 한 개를 가지런히 잘 놓아두었구나. 네 미션은 성공이다. 이제 아빠 차례!

"아빠, 진짜 맛있어요. 국물이 아주!"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일어선 시각은 출발 5분 전. 다이내믹한 일상에서 부녀 사이 호흡은 이렇게 여문다.



# 싸움

남학생과 싸웠다고? 몸싸움이 있었다는 말에 놀랐다. 네가 쥐어박은 동작은 아주 작고 소심하더구나. 의성어도 '콩'을 쓰고 말이다. 네가 맞은 장면에서는 팔을 제법 크게 휘두르더라. 의성어는 '퍽'이고. 어떤 이유든 물리력이 오가는 것은 안 된다. 자신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치고받았다면 이유 불문하고 그 점만은 잘못으로 인정하자. 나머지는 천천히 따지더라도 말이다. 그나저나 네 얘기를 듣고 보니 그 수컷은 유의해서 지켜봐야겠다.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빠짐없이 보고 바란다.



# 일화

한석봉 이야기 아느냐고 물었다. 생뚱맞은 표정을 짓기에 모르나 싶었지. 불 끄고 엄마는 떡을 썬다는 얘기까지 하니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채더구나. 바로 알아채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말이다.

"예지, 아빠는 재활용품 분리하고 버릴 테니 너는 고양이 똥을 치우거라."

한쪽 입술 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비대칭으로 웃는 표정에 담긴 뜻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고작) 그 얘기하겠다고?"

그래, 한석봉 일화까지 끌어들였다. 재밌지 않니?



# 조바심

"친구들이 중학교 수학, 고등학교 수학 푸는 거 보면 조바심이 나기도 해."

'조바심'이라는 말이 영 걸리더라. 얼마 전에 겨우 5학년 2학기 수학 문제집을 끝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다만 TV 앞에 누워 이불 감고 뒹굴거리면서 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긴장감은 한참 떨어졌다.

"아빠 생각에 너는 너만큼 공부하는 애들 중에 가장 똑똑한 것 같아."
"그거 욕이야, 칭찬이야!"

꺽꺽 웃으며 배를 움켜쥐고 뒹굴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칭찬 맞다.

 

# 분석

친구 둘이 썸 타는 것 같다는 네 분석이 흥미로웠다. 가설을 세웠으면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겠지.

"둘이 사물함에 같은 잡동사니를 주고받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친구가 무슨 말 하면 다른 친구 리액션이 지나치게 좋아. 그렇게 재밌는 것 같지 않은데 크게 웃고."

관찰, 분석, 결론 모두 훌륭했다. 특히 리액션을 눈여겨봤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썸 타는 거 맞네.



#토론과 제안

네 스마트폰 사용을 허하느냐, 2G 폰을 쓰되 태블릿을 하나 구입하느냐를 놓고 가족이 꽤 긴 고민을 했다. 보채지 않고 원하는 것을 조리 있게 말하는 태도는 훌륭했다. 그거 안 되는 어른도 많거든.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 2G 폰을 꺼낼 때 좀 부끄러웠어요."

'문자 찐따'라는 말도 들었다니 힘들었겠다. 카톡을 비롯한 일부 앱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언제든 네 이용 현황을 검사받겠다는 제안은 솔깃했다. 물론 그 약속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해진다는 데 아빠 전 재산과 네 곰인형 손목을 거마.



# 거래 요령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예쁜 옷을 받았으면 좋겠어."
"너 스마트폰 복구로 퉁치기로 했잖아."
"아빠가 선물 준다면서. 됐어. 나 선물 필요 없어."

아직은 실리보다 자존심이구나. 엄마에게 좀 배워야겠다. 얼마 전 명품 백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선수 치더니 정장 구두면 되겠다고 하는 거 봤지? 처음부터 구두 카드를 꺼냈다면 아빠는 망설였을 거야. 명품 대신이라니 고마운 마음으로 구두를 덥석 물었지.

"예지야, 그럴 때는 자존심 세우지 말고 손가락으로 아빠 옆구리를 찌르면서 '해 줄 거면서'라고 달라붙어."

그래, 엄마 충고를 받아들이렴.



# 통제 불능

스마트폰으로 갈아탄 지 5일. 12살 초등학생은 스스로 스마트폰 사용량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했다. 약속을 꽤 잘 지키는 네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니 그 물건 참 요물이다. 네 사용 현황을 아주 꼼꼼하게 실시간 체크 가능한 앱을 설치한 게 그나마 다행인가? 약속한 일주일 사용량을 5일 만에 가뿐하게 넘긴 것을 확인한 네 표정이 착잡하더구나.

"아빠가 속상한 건 스마트폰을 쓰기 전에 네가 했던 모든 약속이 단지 스마트폰을 쓰고 싶어서 한 거짓말이 된 것 같아서. 이해해?"
"이해해. 속상할 것 같아."

5일 동안 사용 데이터를 근거로 다시 계획을 짜자. 물론 늘 그랬듯 네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해 절묘한 거래(?)를 진행할 것이다. 노동조합 일하면서 몇 가지 기술을 익혔거든.



# 레벨 차

현빈 씨가 주인공인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을 나란히 누워서 보다가 괜히 슬로 모션으로 주먹을 내밀며 물었다.

"너 레벨 몇이야?"

슬로 모션으로 내민 주먹을 가볍게 막으면서 빠르게 주먹 연타를 아빠 어깨에 먹이더구나.

"몰라, 아빠는?"
"나? 예지 레벨보다 플러스 1."

그런 게 어딨냐며 다시 좌우 주먹 연타를 아빠 어깨에 먹이는데, 부녀 사이 레벨 차이 따위 아무 의미 없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주먹 참 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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