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편지 to ye-ji

2020년 열네 살

# 약한 쪽과 맞는 쪽

다른 고구마를 두고 굳이 엄마가 자기 먹기 좋게 자른 고구마를 아빠가 냉큼 집어 먹으면서 시작한 커뮤니티 댓글 같은 공방은 점점 유치하게 진행됐다. 보다 못한 네가 엄마를 거들더구나.

"예지, 딱 봐도 아빠가 지금 엄마보다 약한 게 보이지 않아?"
"보여."
"그러면 약한 사람을 도와야지 왜 센 사람을 도와? 섭섭해."

한참 어이없이 웃던 네가 곧 표정을 수습하며 이렇게 매듭짓더구나.

"왜 약한 쪽을 도와? 맞는 쪽을 도와야지."



# 엄마 분석

"사실 자기도 자기 마음을 잘 모르는데 옆에서 마음에 드는 뭔가를 말해주길 기다렸다가 그게 아닌 다른 말을 하면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엄마는 왜 말을 애매하게 해놓고 못 알아들으면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더니 네가 이렇게 멋진 분석을 내놓을 줄이야. 14살, 이제 아빠를 일깨우는 나이구나.



# 문제집은 어디에?

이사하고 나니 네 숙제 문제집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하더구나. 책이 모조리 섞였으니 어쩔 수 없지. 당연히 숙제를 미룰 수밖에 없겠다. 억울한 표정 짓지 않아도 된다. 이런 상황이 네 뜻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네가 그런 일로 수작 부리는 스타일도 아니고.

아빠? 아빠가 같은 상황이라면 엄마 없을 때 기어이 문제집을 찾아내 재활용 쓰레기로 분류해서 넣었을 거야. 종이 상자 가장 아래쪽에. 그리고 엄마가 집에 들어오면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하겠지.

"엄마, 오늘 재활용 쓰레기는 제가 버릴게요."



# 엄마 형사

주말 이틀 동안 낮에 잠깐 조는 너를 본 엄마 형사 직감은 날카로웠다. 상당히 늦은 시각에 영장도 없이 네 방으로 들이닥치더니 기어이 대포폰(?)을 쓰는 너를 현장 검거하더구나. 번호는 정지됐어도 와이파이만 되면 인터넷을 쓸 수 있는 중고폰은 네가 지금 쓰는 폰에 걸려 있는 ‘사용 시간제한’ 따위도 없지. 이틀 동안 즐거웠니? 바로 나무라지 않고 증거품만 압수하는 게 또 네 엄마 방식이다.

"아빠 닮아가지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방으로 들어오는 엄마 말을 딱히 부정하기 어려웠다. 다만 아빠 같았으면 더 오래 들키지 않았을지도... 아니다, 어쨌든 더 착하게 살아야겠다. 너나 나나.



# 교가

"교가에 이 나라의 초석이 되자는 가사가 있는데, 솔직히 모두가 초석이 될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안 될 수도 있고, 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졸업 때가 되니 이제야 고백하는 거야?"
"응."

배시시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질에 대한 고민에 앞서 개인이 누릴 권리 먼저 성찰하니 초등학생 졸업 소감으로 더 바랄 게 없구나.



# 산책

산책을 제안하는 엄마 속셈이 궁금했다. 너를 앞세우더니 슈퍼마켓 쪽으로 가자더구나. 아파트 울타리를 벗어나자 방향 감각을 잃은 네 모습을 보면서 교육 과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 이사하고 바로 했어야 할 과정인데.

첫 목적지 슈퍼마켓에 도착하자 엄마는 네게 빨리 갈 수 있는 다른 길도 가르치더구나. 그렇게 아파트 주위를 돌며 버스 타는 곳, 편의점, 정문과 후문 동선 등을 너에게 입력했지. 훌륭한 교육 방법에 감탄했다. 집에 들어오면서 엄마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제 슈퍼에 심부름 보내도 되겠네."

잊지 말자. 엄마는 다 계획이 있다.



# 휴원

엄마가 학원 휴원 소식을 전했다. 알겠다는 말투와 표정이 영 심드렁하구나. 엄마가 방문을 닫고 3초쯤 정적이 흘렀다.

"예지야, 이제 웃어도 돼."
"그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괜히 내가 기분이 좋더라.



# 신입생 카드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신입생 카드'라는 것을 쓰는구나. 잠시 고민하더니 장래 희망에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쓰고 아빠에게 종이를 넘기길래 왜 그러나 했다. 그 옆에 네 진로에 대한 학부모 희망 사항을 적는 칸이 있네.

"꿈을 잘 가꾸고 키우길 바랍니다."

전혀 어렵지 않은 답이었다. 그 아래 담임 선생님이 참고할 사항이 있으면 기록하라는 문항도 있더라.

"나 아닌 다른 것에 공감하려고 애쓰는 아이입니다. 그만큼 공감받는 것을 또 좋아합니다."

선생님께서 꼭 참고했으면 좋겠다.



# 20년 전 나에게

방학 오브 더 방학을 즐기는 너에게 꽤 멋진 이벤트를 제안했다.

'20년 뒤 이예지가 지금 이예지에게 쓰는 편지'.

처음 갸웃하던 네가 해보겠다고 해서 기뻤다. 지금 네가 생각하는 미래든 30대 이예지가 보는 지금이든 너에 대해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빠는 14살 이승환에게 편지를 쓴다면 뭐라고 쓸 거야?"
"아빠? 호돌이 오락실 가지 마. 거기 가면 엄마한테 들켜!"

저녁에 읽은 20년 뒤 네가 보낸 편지는 신기하고 흥미로웠으며 애틋하고 먹먹하면서 대견했다.

 

안녕, 나는 20년 뒤 너야.

너는 장래 희망을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서 진짜 하고 싶은 거랑 제일 비슷한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썼구나. 지금 난 일러스트레이터는 맞아. 하지만 어느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프리랜서랄까? 아무튼 프리랜서로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 돈을 엄청 많이 벌진 못해도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서 행복해.

네가 쉬는 시간이 아주 많았을 때 혼자 생각보다 많은 걸 했더라. 운동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고 컴퓨터랑 아이패드 갖고 놀기도 하고. 별로 하고 싶진 않았겠지만, 숙제도 하고. 혼자 잘 놀았던 것 같아. 못 놀아서 후회할 일은 없을걸?

그리고 그때도 그렇고 학교 다닐 때도 그렇고 틈틈이 생각나는 좋은 아이디어를 어딘가에 기록해뒀던 게 좋은 습관이 된 것 같아. 너 자신을 누구보다 잘 표현하고 그림을 글로, 글을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는 능력에 많은 도움이 됐어.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너무 상심하거나 분하다고 생각하진 마. 하나하나 이겨내는 게 더 중요해. 하나 더 얘기하자면 남들 오지랖에 신경 쓰지 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은근 걱정하는 척하는 사람 말을 네가 듣고 상처 받을 가치가 없어.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널 좋아해 줄 사람은 언제나 있고, 네가 판단한 게 정말 옳은 거라면 그걸 믿고 따라가면 돼. 네가 빨리 강해지는 방법을 배우면 좋겠어. 좋게 대해도 좋을 사람과 굳이 좋게 말해서는 알아듣지 못하고 널 상처 주는 사람은 구분해야 해. 중학교 생활도 마냥 나쁘기만 하진 않을 거야. 뭐든 적당히. 파이팅.

- 포스트잇 네 장을 채워버릴 줄은 몰랐던 20년 뒤 네가 -

 




# 오페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www.metopera.org)가 마련한 이벤트를 소개할 때만 해도 무료한 일상에 작은 균열이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일 트로바토레>에서 시작해 <라 트라비아타>, <연대의 딸>, <람메르 무어의 루치아>, <유진 오네긴>까지 꼬박꼬박 잘 챙겨보더구나. 길면 3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작품을 흥미롭게 보는 네가 흥미로웠다.

물론 아직은 네가 오페라를 즐기는지 오페라를 즐기는 자신을 즐기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럴듯함을 추구하는 본성이 인류 문화 수준을 끌어올린 것은 분명하다.

이 고단한 시기에 '나 이거 봤거든'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디니. 삶이 흥정이라면 남는 장사다.



# 언니

집 근처 강변에 흐드러진 벚꽃 빛깔이 막바지더구나.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선에서 산책하기로 했다. 꽃빛과 봄볕이 잘 어울리는 자리에 너와 네 엄마를 멈춰 세워 사진을 찍는다. 해맑은 너와 달리 좀 걸었다고 지친 네 엄마 표정이 영 별로구나. 네게 한마디 부탁할 수밖에 없더구나. 덕분에 아주 마음에 드는 모녀 얼굴을 담았다.


“하나, 둘, 셋. 언니!”



# 훌라

훌라를 가르쳤다. 이길 가능성을 키우고 질 것 같으면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모습이 카드 게임에서조차 잘 드러나더구나. 이 말을 할 때 표정과 손짓이 참 예뻤다.


"아빠, 땡큐!"

엄마가 포커는 가르치지 말라 했으니 포커는 엄마 없을 때 가르쳐 줄게.



# 표현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괜찮으면 괜찮고, 나쁘면 나쁘지 굳이 한 번 더 이유를 묻는 이유가 있다. 네 감정을 더 섬세하게 표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슷한 느낌을 다른 언어로 구별하는 능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더 성숙하다고 믿거든.

"친구 중에도 자기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애들이 있을 것이고 모든 싫은 감정을 한두 마디로 그냥 퉁치는 애들도 있잖아."
"어, 있어. 남자애들."

그게 말이다 30년 전 아빠도 알파벳 두세 글자와 숫자 한두 개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기는 했단다.



# 교복

중학교를 한 번도 가지 않은 중학생아, 학교에서 꽤 충격적인 알림이 왔다고 들었다. 소식을 전하는 엄마도 적잖게 당황하더구나.

"교복 하복을 맞추라네. 동복을 입지도 않았는데."

학교에서 입은 적도 없는 그 교복 기념사진이나 찍고 옷장에 넣어야겠다. 어쨌든 너는 커서 할 얘기가 참 많겠다.



# 암기

아이유 신곡을 하루 만에 외웠다며 배시시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24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24시간 안에 몇 번을 반복했는지가 중요하겠지. 노력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즐기는 사람이 기꺼이 더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암기 과목은 이담엔터테인먼트가 담당하면 안 될까?



# 교육 방침

혼자 점심도 잘 챙겨 먹고 빈 그릇을 물에 담가놓기까지 했구나. 대견하다.

“98점!”


뭐가 궁금한지 표정에 뻔히 드러나는데 괜히 뜸을 들이더라. 어서 물어보거라.

“2점은 왜?”
“훌륭했는데 100점 주면 오만해질까 싶어서.”

피식 웃는 게 시덥잖아서니? 100점은 이런 교육 방침에 주는 게 마땅하단다.



# 술 마실 때 기분

"아빠, 술 마시면 어떤 기분이야?"

밤길을 함께 걷다 느닷없이 받은 질문에 끝내 답하지 못했다. 딱히 답이 없거니와 그 답이라는 게 사람마다,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마다 천차만별이니.

언젠가 네가 술을 마실 때면 좋은 사람과 좋은 술을 좋은 음식과 좋은 분위기, 좋은 장소에서 즐길 일이 잦았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사정이 못한 삶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사정이 나은 삶을 막연히 동경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다. 흥이 올라 평소 표현하지 못했던 너를 적극적으로 유쾌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 모기

예측하기 어려운 궤적으로 엘리베이터를 휘젓는 모기를 발견한 너는 짧고 낮은 비명을 질렀다. '긴급재난문자'보다 더 긴박하구나. 아빠방역본부는 즉시 목표물을 추적했다. 네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레이더 삼아 센서를 가동하니 생물형 비행체가 포착됐다.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접어 목표물을 정확하게 가격한 순간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이 절묘하게 겹치더구나. 물론 네 영웅은 그런 하찮은 연출 따위는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내려치는 소리 때문에 흠칫 놀라던 동네 아주머니 1과 2께서 환호하는 너와 모기를 털어내는 아빠를 보고 환하게 웃는 거 봤니? 마스크로 얼굴 반을 가렸는데도 표 나더라. 마을 평화는 또 이렇게 지켜지나 보다.



# 공포

며칠 전 일상에서 공포를 호소했던 게 기억난다. 어쩐지 침대 밑에 뭐가 있는 것 같고 문 뒤에 누가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기어이 침구를 들고 오더니 아빠와 같은 방에서 자더구나. 성장 과정에서 몇 차례 공포를 지나치게 느끼는 시기가 있다. 아빠는 '상상 면적이 넓어졌을 때'라고 표현하는데, 공포를 인식할 재료가 부쩍 늘어나는 시기라고 치자. 당연히 공포는 인류 생존에 큰 도움을 주는 생체 시스템이다.

"아빠 방에서 자도 돼?"
"돼. 대신 네 잠자리는 네가 정리해."
"언제까지 돼?"
"공포를 견디는 것보다 매일 침구를 정리하는 게 힘들 때까지."

 

밝아지는 얼굴을 보고 아빠 답이 또 현명했다는 것을 확인한다.

 

# 자극

결과를 놓고 다그치거나 닦달하지 않는다는 게 네 부모 소신이다. 다만 경쟁에 매우 둔감한 너를 보며 어떤 잠재력을 터트릴 최소한 자극조차 제공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때도 있단다.

"엄마, 공부도 안 하고 시험 범위는 몇 배 늘었는데 그래도 절반 정도 맞추면 괜찮은 거 아냐?"

 

아빠 생각에는 네가 공부 안 하는 애들 중에는 공부 제일 잘하는 것 같다.



# 반전

"네 개 틀렸어요."

며칠 전 절반 정도 맞혀놓고 당당하던 네가 수줍게 말하기에 당황했다. 해명은 당당하게, 자랑은 수줍게 하는 게 딱 네 엄마구나. 한동안 책을 좀 붙든다 싶더니 결과가 좋아 다행이다. 애쓴 만큼 성과를 내는 게 노는 것 못지않게, 때로는 더 즐거우면 좋겠다. 어느 즐거움을 택하더라도 응원하는 게 또 아빠 역할이다.

"이런 흐름이면 다음에는 다 맞힐 수 있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이제 시험이 없어요."

물론 앞으로도 세상은 네 자신감에 맞춰 판을 깔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참 유감이다.



# 등교

2020년 6월 8일. 페이퍼 중학생이 등교하는 날. 새로운 일상을 응원하마. 건투를 빈다.



# 방송부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는 네가 개학하기 무섭게 방송부에 지원하겠다고 해서 꽤 놀랐다. 스스로 지원 서류까지 작성하는 모습이 무척 대견하더라. 너는 서류 전형에서 떨어질 것을 걱정했지만 내용을 읽어 보니 얼굴 한 번 보고 싶게 썼더구나. 면접까지 무난히 가겠다 싶었다. 다음 날 면접에서 너무 긴장해 답을 잘 못한 것 같다며 아쉬워할 때 아빠가 했던 말은 진심이다.

"떨어지면 너도 아쉽겠지만 결국 손해가 큰 쪽은 방송부일 것이다."

오늘 오후에 받은 네 문자 덕에 모처럼 마음이 벅찼다.

 

"방송부 인수인계받아야 해서 늦어용..."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너는 미디어 금수저란다.



# 나랏말쏘미

슈퍼에서 과자 상자 하나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예지, 촘크래커!"

일상에서 시도하는 유머가 아무리 기특해도 어이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고루 섞인 미소가 와 닿았다. 계산하고 나서 조용히 다가와 이야기하는 시점도 훌륭했고.

"아빠, 훈민정음 있잖아. 아빠 말 대로면 시작할 때 '나랏말쏘미'야."

반박 논리도 정교하구나.



# SOS

버스를 타야 하는데 집에 지갑을 놓고 왔다며 반쯤 울먹이는 네 전화 목소리에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그것을 티 내지 않는 게 아빠로서 능력이란다. 엄마는 왜 하필 전화를 받지 않는다니.

"학교 근처 문방구 가서 아빠에게 전화해. 그리고 사장님 바꿔 줘."

선뜻 1만 원을 줄 테니 걱정 말라는 문방구 사장님 배려가 고맙구나. 바로 송금했다. 여섯 글자로 제한된 입력창에 '차비 대출 딸'이라고 적었다. 언젠가 질풍노도 시기를 겪을 때 도대체 아빠가 해 준 게 뭐냐는 의문이 들면 오늘을 한 번 떠올리기 바란다.



# 재섭써

"아빠, 키 160cm 좀 넘고 몸무게 40kg 조금 넘는 애가 자기 살쪘다고 짜증 내."

키 160cm에는 확실하게 못 미치고 40kg은 가뿐하게 넘는 네가 보기에 영 언짢았구나. 이럴 때 또 보호자 역할이 있다.

"그런 애들을 세 글자로 뭐라 하는지 알아?"
"세 글자? 뭐라 하는데?"
"재섭써!"
"네 글자 아니야?"
"아니, 네 글자로 말하면 느낌이 살지 않아. 재섭써!"

재섭써! 재섭써! 재섭써! 함께 3회 복창하고 안정을 찾는 너를 보고 나서 아빠도 평화를 찾았다.



# 밸런스

"저는 짬뽕요. 아빠는요?"

네가 달달한 짜장을 시키면 매콤한 깐풍기를, 맵삭한 짬뽕을 시키면 달달한 탕수육을 시키려 했다. 탕수육을 시키며 그 큰 그림을 얘기했더니 엄지와 검지를 겹쳐 내밀어 찬사를 아끼지 않더구나. 사실 고량주 안주 밸런스를 따진다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단다.



# 증거

엄마와 빨래를 널던 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빨래에서 방부제 가루가 왜 나오지? 아빠 아냐?"
"나? 아니. 예지 아냐?"
"나는 아닌데."
"예지 아니면 아빠야?"
"음, 아빠 바지 주머니에서 나왔거든."

세상이 이처럼 확실한 증거로만 책임을 물었으면 좋겠구나. 미안하다.



# 농담과 사랑

드물게 거는 네 농담이 참 좋다. 상대를 웃음짓게 하려는 그 선의가 좋다. 뭘 좋아할 줄 알 만큼 이해한다는 게 좋다. 웃음 지점을 강조할 줄 아는 영리함이 좋다. 무엇보다 상대가 웃는 모습을 네 기쁨으로 삼을 줄 아는 마음이 좋다.

네가 웃어 내가 웃는다. 사랑이라는 게 이보다 복잡할 리 없다.



# 볼 빨간

집을 나서면서 하늘이 화장실 치우기, 먹이 주기, 슬렁슬렁 책 읽기 등 몇 가지 과제를 남겼다. 그리고 이 상황에 딱 맞는 가사를 떠올렸지.

"예지야~ 부탁해~"

출처를 모르겠다는 표정이기에 아주 쐐기를 박았단다.

 

"볼빨간 사십 대."

 

피식 웃더니 한마디 하더구나.

"볼 빨간 거, 술 때문 아니야?"

아빠 동지 존엄 따위야 어떻든 잘 자라는구나.

 

# 일본

차기 일본 총리 후보군을 보고 혀를 차는 아빠가 이상했니? 일본 시민이 그저 안타까웠단다. 좋은 정치 덕에 나라가 금방 흥하기는 어렵다만 나쁜 정치가 나라를 망치기는 참 쉽다. 너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니?

월등한 경제력, 탁월한 기술, 다채롭고 세련된 문화. 결코 넘어설 수 없을 듯해 스포츠만은 꼭 이겼으면 했던 나라. 아빠에게 일본은 그런 나라였던 것 같다.

"예지, 일본 하면 뭐가 생각 나?"
"일본?"

한참 생각하더니 겨우 한마디 하더구나.

"지진?"



# 용돈

용돈이 필요하다는 너에게 필요한 금액을 물었다.

"5000원?"

 

지갑에서 1만 원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5000원 거슬러 줘야지."
"아니, 내가 5000원 거슬러 줄 돈이 있으면 5000원 달라고 했겠어?"

억울한 상황을 좀처럼 견디지 못하면서 이 항변에는 미소가 걸렸더구나. 당연히 더는 잔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 지갑에 5000원짜리 있었다는 거 아니?



# 초대

이 시국에 친구와 밖에서 놀아도 되겠느냐며 조심스레 묻는 태도가 오히려 안쓰러웠다.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안 된다고 하자 더는 조르지 않는 모습이 짠하더구나. 그래도 '차라리' 따위로 시작하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

"차라리 친구를 집에 오라고 하지. 밖에서는 곤란하니. 친구 부모님도 덜 불안할 테고."
"네, 물어볼게요."

'괜찮아요'가 아니고? 냉큼 제안을 받더니 뚝딱 약속을 정하는구나. 네 친구 올 시각에 맞춰 피자를 시켜놓고 엄마와 함께 집을 나왔다. 그나저나 식당도 카페도 정말 사람이 없더라.



# 외모와 매력

네 외모를 스스로 마뜩잖게 여기는 모습을 가끔 본다. 물론 네 또래가 선호하는 기일쭉하고 갸아름하며 이목구비가 오똑오똑한 외모가 아닌 것은 인정한다. 어쩌겠니? 부모가 생겨먹은 게 그렇는데. 그래도 한 가지는 짚자. 너는 생김새로만 따지면 흔한 엄마 장점과 드문 아빠 장점을 절묘하게 뽑아낸 생명체란다.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매력이다. 외모도 매력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지만 절대적인 것은 따로 있다. 외모는 물론 모든 요소를 압도하는 그것은 바로 태도다. 태도는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고. 매력은 좋은 태도를 오래 쌓으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빠는 네 태도가 참 마음에 든다. 게다가 별 의미 없는 외모조차 괜찮네.



#애쓴 만큼 성과를 얻지 못했을 때

애쓴 만큼 성과를 얻지 못해 섭섭했다면 한 가지만 떠올리자. 네가 애쓰지 않아도 얻었던 수많은 것들을.



# 불운과 행운

제 물건을 책임질 수 없는 나이에 고가 제품을 사 줄 수 없다는 부모를 만난 게 네 불운이라면, 전자제품은 그냥 최신형을 사는 게 마땅하며 괜히 다른 조건을 따지면 평생 신제품을 쓸 수 없다는 외삼촌을 만난 게 네 행운 아니겠니. 새 휴대폰 조심해서 쓰거라.



# 오해와 이해 사이

엄마가 딸 속내를 듣기가 점점 어려운가 보다. 대화가 엇나갈 때면 거울 보고 싸우는 느낌일 테다. 엄마 자신이 얼마나 힘든 사람인지 너를 통해 느끼기를 염원한다. 어쨌든 아빠 출동!

간섭과 무관심 사이 경계는 당연히 숫자로 표기할 수 없다. 100을 중심으로 101이면 간섭이고 99면 무관심이 아니지. 그 경계에서 부모는 늘 고민한다. 어렵니? 네 손목을 잡고 다시 얘기했다.

"여기서 힘을 빼면 잡으나 마나이고, 힘을 더 주면 아플 텐데 그 강도를 아빠는 몰라. 항상 적당하다고 생각하면서 잡는데 적당한 강도는 너밖에 모르지. 어떡해?"
"내가 말해야 해요."
"그 방법밖에 없어. 그런데 참 어려운 게 네가 분명히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말했는데 다음에 딱 그 정도를 못 맞춰. 늘 못 맞춰. 어떡해?"
"그때마다 내가 잘 표현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관계가 어려운 이유고 사는 게 어려운 이유다. 부모와 자식이든, 부부든, 친구든 늘 정답이 없어. 답 근처에서 서로 오해하고 이해하는 것이지. 뭔가 알아들었을 때 입가에 번지는 옅은 미소와 반짝이는 얼굴이 좋다.

"아빠가 전 과목을 다 가르쳐줬으면 좋겠지?"
"응."
"아빠가 그 정도로 공부를 잘하지는 않아."



# 엄마 장점

모처럼 둘이 외식하면서 엄마 장점이 뭔지 물었다. 엄마 장점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람을 보고 평가하는 네 관점이 궁금해서다.

"자신감 있고 뻔뻔한데 밉지 않아. 나와 잘 공감하고 화를 현명하게 내는 것 같아."

화를 현명하게 내는 게 장점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꽤 훌륭한 점을 짚어냈구나. 그래도 공감 능력은 엄마보다 아빠가 낫지 않니?

"아빠는 설명을 참 잘하고 엄마는 같은 여자로서 더 깊게 공감하는 게 있지."

그렇구나. 박명수가 유재석을 이겨 먹으려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구나.



# 예즙 예즙

속상하면 눈물을 잘 참지 못하는 너에게 '예즙, 예즙'이라고 했더니 엄마가 질색하는구나. 입에 착 달라붙어 좋구먼.

"눈물을 참기 힘들 때가 많아."

우는 게 예쁜 모습은 아니다만 감정을 억누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다. 다만 눈물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조차 눈물로 때우지는 않는지 되돌아보는 성숙함 정도는 기대하마. '예즙'이라고 부르자 피식 웃는 너에게 말했다.

"그래도 어릴 때는 즙이 수박 한 통만큼 나왔는데 지금은 레몬 정도? 귤이나 포도 정도로 맞춰 봐."

 


# 반격

가능하면 인적 드문 외곽에서 종종 외식하려 한다. 오가는 길에 차 안에서라도 가을 풍경을 접해야 이 고단한 코로나19 시기를 견디지 않겠니.

"아빠가 주말이면 아내와 딸이 우울해지지 말라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우울해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뭔가 어긋난 답변을 그래도 엄마가 바로잡는구나.

"아빠가 칭찬 좀 해달라는 말이야."
"알아."

알아? 일부러 의도를 비켜가는 대답을 했다? 다 컸구나!



# 팬더

2주 쉬고 1주 학교 가던 초등학교 7학년이 1주 쉬고 2주 학교 가는 중학교 0.5학년 체제로 들어가니 적응이 쉽지 않은가 보다. 집에 팬더 한 마리가 있어 깜짝 놀라 자세히 봤더니 너구나. 팬더도 귀엽다만 딸이 훨씬 낫다. 다크서클 사라지도록 일찍 자고 푹 쉬거라.



# 모기?

"모기야?"

엄마가 사 준 아인슈페너? 맛있더라. 너는 달고나 카페라테네.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단맛에 아인슈페너를 금세 마셔버렸단다. 뭔가 아쉬워서 보니 달고나 카페라테가 많이 남았을 뿐이고. 그래서 빨대를 네 컵에 꽂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뭐? 모기냐고?



# 중간고사

초등학교 7학년, 잘 봐 줘야 중학교 0.5학년이 중학교 1학년 첫 시험을 보다니.

 

"세 과목 중에 네 개 틀렸어요."

무엇이든 시작하면 결과는 그냥 나오는 것이다. 물론 노력에 늘 비례하지 않는다는 게 삶이 어려운 이유지. 그러니 변덕스러운 결과보다 한결같은 과정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네 개? 만점이면 오만해졌을 것이고, 다섯 개 틀렸으면 공부를 포기할 수도 있을 텐데 딱 적당한 점수네. 잘했다."

 

# 코로나 세대

"뭘 했다고 벌써 11월인지 모르겠어."

책상을 정리하면서 한마디 하더구나.

"그러게, 기껏 초띵 7학년 아니면 잘 봐줘야 중띵 0.5학년 같은데."
"아빠, 초띵이라니요. 여기 문제집을 보세요."

중학교 1학년을 증명할 수 있는 흔적이 겨우 문제집이라니 안타깝다. 학창시절은 문제집 풀이만으로 채우는 게 아니라는 아주 평범한 아빠들이나 할 말은 그냥 참았다.

"누구나 누리던 일상을 누리지 못하지만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를 먼저 경험하는 세대 아니겠니."

뭔가 으쓱하는 모습이... 글쎄, 같잖았단다.



# 눈높이

늘 체육복 차림인 네가 모처럼 교복을 입으니 한결 화사해 보였다.

"아빠 학교 다닐 때 같은 반에 예지 같은 친구가 있으면 진짜 좋아했겠네."

싫지는 않았을 텐데 반응은 시큰둥하더구나. 엄마에게 동의를 구했더니 이 재미없는 사람 말씀이 참.

"우리 딸이니까 그렇게 보이겠지."

답답하더라. 하지만 이런 반응까지 이미 예상한다는 게 비범함 아니겠니.

"내가 눈 엄청 높은 거 몰라?"

답은 예상했던 그대로다. 그리고 엄마도 가끔은 재밌는 사람이란다.

"알지, 잘 알지."



# 연예인

엄마 기자가 아미에게 방탄소년단 TV 출연 소식을 전하네. 이런 일정도 코로나 덕이라고 해석하더라. 너도 한마디 거들더구나.

"코로나 아니면 국내 TV에서 BTS 얼굴 보기 어렵지."

그러고 보니 꽤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예지, 아빠가 방탄보다 TV에서 더 보기 힘든 거 알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반사적으로 코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길래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저기요, 아빠는 연예인이 아니잖아요."
"아니지, 나는 다만 방탄보다 TV에서 보기 어렵다는 사실만 말했을 뿐인데."
"저도 아빠가 연예인이 아니라는 사실만 말했을 뿐이에요."

옆에서 엄마가 아주 방긋 웃더라. 네가 압도적으로 이겨먹었을 때 나오는 표정이란다.



# 재능

무려 우수상을 받았다는 네 시를 봤다. 제목이 <다시 봄>이더구나.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을 나름대로 묘사하고 다시 돌아온 봄을 '다시 보고', '다시 봄'이라고 매듭지은 솜씨가 제법이다.

"다시 본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봄... 아재 개그 아냐?"
"아빠, 언어유희라고 하면 안 돼?"

어쨌든 네 시를 보고 어떤 작가적 기질이나 문학성보다 앞서 떠오르는 재능이 있더구나. 그래서 엄마에게 귀띔했다.

"예지 시 보니까 피피티를 진짜 잘할 것 같아."

엄마도 동의하더라.



# 화상 수업

어쩌다 2시간 30분 동안 온라인 세미나를 하게 됐다. 모니터에 뜬 모든 얼굴을 보며 그 얼굴 또한 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집중도가 엄청나고 피로도는 비례하더구나. 그동안 네 온라인 수업을 '꿀'이라고 놀렸던 거 미안하다.



# 파스타

아빠가 파스타도 라면이나 떡볶이처럼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혜택은 네 몫 아니겠니. 그래서 당분간 너는 '예지'가 아니라 '예쥐'가 돼야겠다. 지금 먹는 파스타가 이전 파스타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최대한 섬세하게 짚어내는 게 네가 할 일이다. 알리오 올리오는 세 번 만에 토마토 파스타는 네 번 만에 유튜브에서 보던 때깔이 나오더구나. 면을 빨아들이면서 엄지를 치켜들기에 뿌듯했다.

"맛있어?"
"이번 게 제일 나은 것 같아."
"온라인 수업 후 고단함을 잊을 정도로?"

씨익 웃더구나. 그 정도는 아니구나.



# 발전

BTS가 또 빌보드 1등을 했다고? 벌써 몇 번째라니. 게다가 소식을 전하는 너는 왜 그렇게까지 으쓱한 거니. 괜히 트집을 잡고 싶었단다.

"방탄 얘들은 너무 발전이 없어."
"그러게."

 

깔깔거리며 여유있게 받아치는 모습이 더 괘씸더라.

 



# 미소보다 방역

입가에 걸린 잔잔한 웃음이 참 어여뻤다.

"친구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어 서운하다는 느낌이 오면 괜히 억지로 다가가려 하지 말고 그냥 창가에 앉아서 미소를 지으며 운동장을 바라보기만 해. 꽤 효과 있을 거야."
"아빠, 마스크는?"

그렇구나! 방역이 먼저다.



# 치즈볼

치킨과 함께 온 치즈볼을 두 개 남겼구나. 좋아하는 거 아는데.

"이거 왜 안 먹었어? 먹어."
"아빠는 한 개도 안 먹었잖아."
"먹어. 설마 네가 그거 다 먹었다고 아빠가 내 치즈볼 어딨냐고 따지겠어?"

키득거리면서 마저 먹더구나. 그러니까 아빠가 네 답이 '배 부르다', '먹기 싫다'가 아니라는 점을 날카롭게 짚어낸 것은 뭐라 할까, 관록이라고 하자. 괄호 안에 집어넣은 '더 먹고 싶은데'를 놓치지 않은 게 또 감각 아니겠니.

"맛있어?"

볼이 볼록한 채 고개만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갑자기 치즈볼이 먹고 싶어졌단다.



# 장래희망

"아빠, 나는 장래희망이 없어서 고민이야."

평범한 아빠라면 당황했겠지.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네 아빠 답은 이렇다.

"장래희망? 직업 말하는 거야? 그런 거면 없어도 돼. 대신 진짜 장래희망은 있어야 해. 예를 들어 언젠가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초콜릿을 먹고 싶다 같은 거."

 

 

 

'편지 to ye-ji'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년 열한 살  (4) 2023.12.15
2018년 열두 살  (4) 2023.12.15
2019년 열세 살  (1) 2023.12.15
2021년 열다섯 살  (2) 2023.12.15
2022년 열여섯 살  (1) 2023.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