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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to ye-ji

2021년 열다섯 살

# 러브하우스

2021년 새해를 청소로 시작한다. 치우고 정리할 보금자리가 있다는 게 새삼 좋다. 집주인이 따로 있다는 하찮은 사실 따위는 잠시 잊자. 엄마는 꽤 오래전부터 네 방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싶어 하더구나. 작은 공간에 피아노와 가구를 구겨 넣었으니 보기에 늘 갑갑했나 보다. 민원을 받고 틈나는 대로 머릿속에서 배치를 반복했다.

옮기는 게 피아노, 침대, 옷장, 화장대이니 작은방인데도 드는 일품이 만만찮았다. 그래도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엄마와 입을 다물 줄 모르는 너를 보니 뿌듯하구나. 게다가 '러브하우스' 리액션(아빠가 옆에서 '따라 따라따~' 음악을 흥얼거리면 손으로 눈을 가리고 방에 들어왔다가 손을 내리면서 아주 깜짝 놀라는 척하며 환호하는 연기)을 아주 완벽하게 재연해 더 좋았다. 저녁으로 중국요리를 시키는 엄마 감각도 탁월하구나. '몸 쓰고 나서 청요리'는 진리다.



# 선배

바이러스를 피하느라 분주했던 1년이 성글게 지나고 곧 중학교 2학년이 되는구나. 스스로 애써 시작한 방송반 활동도 만족하니 다행이다. 그나저나 1학년 후배를 맞이하지 않겠니. 이럴 때 딸 놀리는 게 아빠라서 누리는 사소한 즐거움이란다.

"선배님, 선배님, 이예지 선배님. 방송 잘하는 방법 좀 가르쳐 주세요."
"으이구, 좀 하지 마. 요즘 누가 그래."
"왜? 1학년에게 방송은 이런 거야 이것들아! 폼 좀 잡고 그러면 되지."
"그게 꼰대거든요. 저는 그냥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여 주고 싶어요."

그래, 아빠보다 훨씬 좋은 선배가 될 게 분명하다.



# 위로

집에 들어오자마자 푹 처진 너와 마주치니 피로가 제곱이 되는구나.

"예지, 왜?"
"몰라, 학교 다녀오니까 힘들어."

마땅히 달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아빠는 고작 이런 수작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더라.

"나도 회사에서 힘들었는데. 그냥 같이 울까."

살며시 뒤로 다가와 껴안길래 좀 놀랐다. 각자 질질 짜는 것보다 함께 위로하는 게 훨씬 큰 힘이 되는구나. 물론 포옹만으로 서로 충분하다고 착각할 정도로 아빠가 미련하지는 않다.

"치킨 시킬까."
"네!"

그래, 당연히 순수한 네 선의도 의심하지 않는단다.



# 도라에몽

엄마가 푸른빛이 도는 털 재킷을 입고 나오더라.

"저거 어떤 동물 털로 만들었는지 알아?"
"엄마가 동물 아니라고 했는데. 인조라고 했는데."
"부끄러워서 그랬을 거야. 저거 동물 털 맞아."
"무슨 동물?"
"도라에몽."

 

분명히 슬쩍 웃었다! 웃는 거 딱 봤다!



# 사촌오빠 친구

대입을 확정한 사촌 오빠가 친구와 함께 놀러 왔네. 저녁을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시간이 즐겁더라. 컴퓨터를 전공한다는 사촌 오빠 친구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한참 펼쳐놓더구나.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지.

 

"직업이 꿈이 아니라서 좋네. 꿈이 꿈다워야지. 생각하는 대로 잘 됐으면 좋겠다."

그때 그 친구가 하는 얘기 들었니?

"어른한테 그런 말 처음 들어봤어요. 부모님도 쓸데없는 얘기 한다고 뭐라 하는데, 고맙습니다."

들었니? 한 번 더!

"어른한테 그런 말 처음 들어봤어요."

그러니까 얘야, 마음껏 누린다고 귀하지 않은 게 아니란다.



# 아이유 신곡

노트북 앞에서 아주 감탄이 연속이구나. 어쭈구리! 눈물까지 글썽글썽? 왜?

"아이유 신곡이 너무 좋아. 위로받는 것 같은데, 위로를 너무 예쁘게 해."
"안 그런 적 있어?"
"늘 그랬지."
"걔도 발전이 없구나."

아주 얄미워 죽겠다는 표정을 보니 또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훗.



# 댄스 동아리

주 1회 스포츠 시간이 생기면서 종목을 선택해야 했다고? 축구, 탁구, 배드민턴, 댄스 가운데 하나 고르는데, 종목은 쉽게 나누지만 친구들 마음이 어디 그렇나.

"배드민턴을 하고 싶었는데 친구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댄스반에 들어갔어."
(댄스를 하고 싶었구나)

"축구는 남학생만, 댄스는 여학생만 지원할 수 있다고 해서...여자도 축구하면 안 되나? 댄스는 생각보다 별로 지원하지 않아서."
(댄스를 하고 싶었구나)

"그냥 아무 춤이나 추라고 해서 BTS 춤 아는 거 하나 했는데 선생님이 잘한다고 해 주셨어."
(댄스를 하고 싶었구나)

"아빠는 뭐가 괜찮은 거 같아?"
"아빠? 네 개 중에 댄스가 제일 나은 거 같은데. 애들이 별로 지원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다."
"그런가?"
(댄스를 하고 싶었구나)



# 탈락

의욕적으로 도전한 교내 댄스 동아리 오디션에서 탈락했구나.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이 짠하면서 대견했다.

"예지, 모든 오디션에 100% 탈락하지 않는 방법이 있어."
"뭐?"
"지원하지 않으면 되지."

피식 웃길래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바둑 두는 이세돌 아저씨 있잖아. 예전에는 이 아저씨가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더라. 진정한 승부사지. 예지도 승부사야. 정말 대단해."

거듭 말하지만 진심이란다.



# 계획

계획 세우기가 어렵다고? 엄마 밀정에게 들었다. 네 고민 처리하는 게 내 취미 아니겠니.

"계획을 왜 세워?"
"뭘 하려고 세우지."
"그런데 그 계획을 짜는 게 뭘 하기도 전에 힘들면 되나?"
"그렇기는 하네."

계획은 큰 덩어리로 지키기 만만할 정도만 세우자. 섬세할수록 훌륭하게 보이겠으나 세울 때부터 부담스러운 계획은 목표에 닿는 길만 멀게 할 뿐이다. 오히려 사소한 성취를 모아 다음 계획을 다듬는 동력으로 삼는 게 낫다. 그렇게 세운 계획을 주위에 떠벌려라.

알아듣는 듯한 환한 표정이 늘 반갑다. 맞춤형 해답 덕이라고 믿고 싶으나 엄마 야근 때 시킨 치킨이 만든 분위기 아니겠니. 그 정도는 안다. 다음 날 벽에 붙인 메모지에 큼지막하게 쓴 '사회, 과학'은 혹시 계획이니? 좀 웃겼단다.



# 판결

늦은 저녁이 필요한 너에게 잽싸게 계란밥을 지어 내놓았다.

"맛 없으면 경찰에 신고해."

피식 웃으면서 한 숟갈 뜨더구나.

"아빠."
"왜?"
"무죄야."

 



# 과정과 결과

시키지도 않는 시험공부를 끙끙거리며 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 기특했다. 공부라는 게 아예 손 떼면 모르겠지만 하면 할수록 한 것보다 할 게 많은 법이다.

"공부하지 않은 데서 문제가 나오면 어떡해?"

 

잘 맞은 공이 수비수 정면으로 가서 잡히기도 하고, 빗맞은 공이 어중간한 곳에 떨어져 안타가 되는 일도 있다. 그게 야구가 어려운 이유거든. 삶이 야구보다 쉬울 리가 없잖아?

"결과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만 과정은 배신하지 않아. 삶은 결과를 얻는 게 아니라 과정을 쌓는 것이고."

지금은 뭔 소리인가 하겠지만 언젠가 이 자애롭고 놀라운 통찰에 무릎을 칠 일이 있을 것이다.



# 시험 성적

애쓴 만큼 시험 성적이 나오지 않아 실망이 크겠다. 담임 선생님이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는 얘기를 듣고 웃음을 참을 수 없더라. 할 말 없으면 그냥 이렇게라도 답하지 그랬니.

"아빠가 갑자기 입원해서 그만, 어흑."

물론 연기는 네 재능이 아니다. 두 가지 큰 성과가 있구나. 먼저 네 부모는 평소 장담한 대로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했겠지? 네 스스로 다른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는 게 두 번째 성과다. 가족이 모여 계획을 짜는 이 과정 또한 앞으로 맞이할 그 어떤 결과보다 소중하구나.

"이제 발전할 일밖에 없나?"
"다음에 더 못하면 어떡해?"
"그다음에 더 쉽게 발전하겠지."

진심이란다.



# 고마우니까 꺼져

선의를 '착한 척'으로 놀리는 친구들 때문에 힘들다고? 사람과 삶이 얽히는 일상은 너무나 다채롭고 복잡하며 뜻하는 대로 이뤄질 리도 없기에 그런 친구 녀석들이란 오히려 아주 선명해서 고마운 존재란다. 그래서 이런 대사를 권하마.

 "고마우니까 꺼져!"



# 기준

외식하고 나서 감상(?)을 물으면 늘 괜찮았다고 하는구나. 그래도 파는 음식인데 웬만해서는 먹을 만한 것을 내놓지 않겠니. 밥값 내는 아빠 마음도 배려해야겠고. 정확한 감상을 거들고자 기준을 제시했다.

1) 다음에 꼭 다시 오고 싶다 = 괜찮다
2) 가자고 하면 가겠는데 애써 다시 오고 싶지는 않다 = 평범하다
3) 다음에 절대 갈 생각 없다 = 실망이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어때?

 

"아빠, 평범했어."



# 핑계

시험공부하는 네 뒤로 가서 머리를 잡고 좌우로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다 까먹어라. 다 까먹어라."
"아, 아, 아빠!"
"이제 시험 못 치면 아빠 때문이라고 해."

곧 환해지는 얼굴을 보니 이번에도 학습이 충분하지는 않은가 보구나. 괜찮다.



# 전치사

영어 문법(전치사)이 어렵다고? 영미 제국주의와 근본 없는 우월감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과 상관없이 영어를 잘 못하는 아빠는 바로 본질적인 교육 문제를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이 상황에서 문법을 쉽게 정리하고 시험 팁을 알려주는 것은 평범한 아빠들이나 취할 행동이지.

"괄호 열고 전치사 넣으라고 할 게 아니라 영어로 질문하고 영어로 답하게 해서 그 답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논리와 문법적으로 타당한지 보면 될 거 아냐."
"그러면 채점하기 너무 힘들지 않을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때는 비겁하지만 이 방법뿐이구나.

 

"너 지금 선생님 편드는 거야?"

 

황당하다는 표정이 어찌나 우습던지. 어쩐지 허를 찌른 듯해 뿌듯했단다.

"누구는 시험 치는 게 좋은 줄 알아?"

 

뭐가 좋겠냐. 수고해라.



# 기말고사

"저번보다 괜찮은데 이번 시험 준비도 힘들었어."
"저번보다 나으면 됐어. 엄마도 걱정해서 아빠가 말했지. 내년 3학년까지는 시행착오를 겪느라 힘들겠지만 고등학교 들어가면 신경 안 써도 알아서 잘할 거라고."
"그래? 그런데 고등학교 들어가도 못하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일단 1년 넘게 벌었잖아."

빵 터지는 너를 보며 진한 동지애를 느꼈단다.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구나. 수고했다.



# 이행시

"아빠, 구름으로 이행시 가능해?"
"응."
"구."
"구글로 검색했습니다."
"름."
"름으로 시작하는 말."



# 바이크 커플

오토바이를 다정하게 탄 연인이 신호를 받고 우리 앞에 멈추더구나. 앞에 탄 오빠가 휴대폰을 치켜드니 뒤에 탄 언니가 화면에 잘 들어가게 얼굴 각도를 조정하는 거 봤니? 비도 제법 오는데 말이다. 뭐 청춘 아니겠니.

"저 앞에 셀카 찍는 언니·오빠가 다정해 보이네. 어때?"
"잘 모르겠고 저 폰은 방수가 돼?"

 

관심 없는 척하기는… 알겠다!



# 가능성

아이유 노래를 흥얼거리는 너에게 말했다.

"걔는 발전이 없어. 고작 정상에서 한참 정체된 가수라서 맘에 들지 않아."

피식하는 너에게 한마디 더 보탰다.

"아이유에 비하면 우리 예지는 발전 가능성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아빠, 조용히 해!"



# 호의

같은 반에 호감 가는 여자 애가 있다고. 분위기가 묘해 아직 말도 걸지 못했다며 배시시 웃더구나.

 

"같은 이유로 너에게 말을 잘 못 거는 친구도 있을 걸."
"그런가? 모르겠는데."
"너도 좀 묘한(까칠한) 분위기가 있어"
"사실 먼저 호의를 보였는데 반응이 별로면 어쩌나, 그런 게 좀 무서울 때가 있어."

 멋쩍은 표정이 예뻤다. 섬세한 감정을 짚어내는 게 대견하구나. 그 감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아빠도 좀 그런 게 있거든. 어쨌든 그 영역은 내가 호의를 보이면 상대도 호응하는 게 마땅하고, 상대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식이 문제라는 태도로 살고 있는 엄마에게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



# 연대

따돌림, 폭력 같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부조리와 마주치면 주저 없이 말하라고 했다. 학교는 중요한 세상이지만 그 모든 것을 감내할 만큼 대단한 세계도 아니기에. 척박하고 천박한 네 또래 괴롭힘 뉴스를 보고 억장이 무너지더라. 괜히 너를 불러 물었다.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 힘든 거 없어?"
"그런 거 없어."
"그리고…."
"나 말고 다른 친구가 당하는 것을 봐도 꼭 얘기하라고? 알지."

잘 기억하는구나. 선하지만 나약한 존재가 존엄을 잃지 않는 방법이 연대다.



# 불신

엄마는 백신 맞고 붙인 밴드 위에 혹시나 싶어 방수 밴드까지 붙여서 조심하며 씻었나 보더라. 방수 밴드를 어색한 자세로 떼려 해 거들고자 다가갔다.

"됐어. 자기가 떼면 밑에 밴드까지 다 뗄 테니까 내가 할게."
"역시 매사 나에 대한 신뢰가 깊구나."
"뭐가?"
"방수 밴드를 떼면서 원래 붙인 밴드까지 뗄 게 분명하다는 깊은 신뢰."

 

잠시 말을 잊은 엄마를 보니 뿌듯했다. 뒤에서 들리는 유난히 차분한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빠, 그건 불신이에요. 불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물론 네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 전면등교

"우리 개학하면 전면등교라던데."

교육청 방침이 그렇다면야. 뭐가 문제인데?

"아니, 우리 밴드 동아리 6명 모이는 것은 4단계라서 안 되고 우리 반 40명 모이는 것은 괜찮아?"

 

부당하구나. 아주 쉽게 설득됐단다. 네가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 거칠게 얘기했다면 개학 때 학교를 보내지 않을 뻔했다.



# 허쉬컷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거추장스러웠는지 얼마 전부터 단발 얘기를 흘리더구나. ‘털쪘다’는 표현에 한참 웃었다. 드디어 엄마 카드 장착하고 미용실로 돌격!

엄마 사령관은 출동 전 딸 대원에게 머리칼 길이며 맵시 관련 작전을 제시하더라. 잠깐 스치는 시큰둥한 표정을 아빠 운전병은 놓치지 않았다. 미용실로 딸 대원을 이송하면서 점검 들어갔다.

"생각하는 스타일 있어? 하고 싶은 대로 해. 어차피 미용실 원장님은 무조건 예쁘다고 할 거야. 자기가 잘랐는데 못났다고 할 리가 없잖아. 네가 하고 싶은 스타일을 디테일하게 요구해. 그런 거 있어?"

잠시 주저하던 네가 말했다.

 

"약간 층도 주고 싶고 앞머리도 몇 가닥은 길이를 좀 따로 맞추고 싶고…."
"계획이 다 있구나! 딱 하고 싶은 대로 해."

몇 시간 뒤 집에 등장한 네 걸음이 몹시 당당하고 표정은 흐뭇했다. 어깨 근처에서 상랑살랑 흔들리는 살짝 말린 머리칼이 매력적이더라.

 

“무슨 스타일이야.”
“허쉬컷.”
“그게 뭐야?”
“어떻게 말로 설명해?”

 

내민 폰을 보니 활짝 웃는 외국 모델 언니 스타일이 너와 같구나. 검색 많이 했네.



# 백사장

친구와 근처 바다를 다녀와서 여기저기 찍은 사진이 정겨웠다. 어여쁜 풍경을 보면 바탕화면 같다고 한 것은 웃자고 한 말이지 공대 출신 아빠가 감수성이 메말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니 너마저 모래밭과 바다, 하늘을 적절하게 걸친 색감 좋은 사진을 내밀며 바탕화면 같지 않으냐고 묻지 않아도 된다.

"친구와 모래밭에 '우리 우정 변치 말자'고 썼어? 글씨를 파도가 쓸고 가고. 바다에 갔으면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아빠, 손.톱.밑.에.모.래.들.어.가.잖.아.요."

어이없을 때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하는 것은 분명히 엄마 영향이다. 그런 말투가 아빠 농담을 상당히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마.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개학 이틀을 앞두고 간 바닷가 모래밭에서 아무것도 안 했다고?

"발뒤꿈치로 하트는 그렸어요."

 

그래, 그 정도 낭만은 있어야지.



# 여한이 없다

재밌게 읽은 소설 줄거리를 조곤조곤 얘기하는 모습이 참 예뻤다. 휴머노이드가 나오는 SF인데 흥미롭더구나.

"벌써 예지가 소설을 읽고 줄거리도 얘기해 주다니. 아빠가 백 년 뒤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
"백 년? 그 정도면 충분한 거 아냐?"
"그러니까 여한이 없다고."

피식 웃기에 한 방 더 날렸지.

"어쨌든 아빠 딸 중에는 예지가 최고야."
"딸 하나 아니세요?"
"그러니까 최고라고."
"너무하시네요."



# 만남과 거리

"오늘 우리 처음 만난 거 알아?"

저녁에 마주친 너에게 물었다. 아침에 서로 인사도 없이 출근하고 등교했잖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더구나. 그래, 그랬다고.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방에서 나가는 너에게 또 물었다.

"오늘 우리 처음 만난 거 알아?"
"아까 만났잖아."
"0시가 넘었거든."

피식 웃으며 나가더구나. 문을 닫는 뒷모습을 보며 낯선 거리에 익숙해져야 할 때가 다가오는 것을 예감했다.

 

# 보호자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뿔난 표정에 반쯤 젖은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택시가 유난히 잡히지 않아 이미 기분 상했는데 가까스로 앞에 선 택시를 어떤 아주머니가 양보하라면서 가로챘다고. 중학생에게 그런 양보를 강제하는 어른은 어른이 아니다. 그 뒤로 한참을 걸려 어렵사리 집에 도착했구나. 말하면서 벌써 볼에 물방울이 또로록.

"아줌마 얼굴 생각나?"
"어."

수건을 네 앞에 넓게 펼쳤다.

 

"한 대 쳐. 얼굴 상상하면서."

 

울음과 웃음이 반쯤 섞인 표정으로 주먹을 내지르더구나. 제법 매섭더라.

"기분이 좀 풀려?"
"응."
"치킨 시킬까?"

환해지는 표정을 보니 보호자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남았음을 확신했다.



# 선풍기

식탁에 마주 앉아 휴대용 선풍기를 틀더구나. 조금 덥기는 하더라. 작은 선풍기가 회전 기능까지 있으면 좋으련만.

 

"예지, 회전!"

 

씩 웃더니 선풍기를 들어서 아빠 쪽으로 돌렸다가 네 쪽으로 돌렸다가... 센스쟁이! 그런데 회전 속도가 아빠 방향으로 0.3초 머물고 네 쪽에서는 10초 정도 머무네. 깔깔거리는 모습을 보니 잘 키웠다 싶더라. 이런 시간 배분은 인공지능이 사람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다 싶었고.

 

 

# 통증

피곤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너에게 물었다.

"피곤해? 가장 피곤한 게 10이면 얼마 정도 피곤해?"
"7 정도?"

 

많이 힘들었구나. 그런데 어느 정도 피곤하면 10일까?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예지, 혹시 지금 상태에서 생리 중이면 10쯤 되니?"
"아빠, 그러면 50도 넘어!"

몰라서 미안하다. 하지만 그 고통을 그 정도 수치로 구체화해 준 여성은 네가 처음이란다.

 

# 빨간 머리 앤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 시리즈를 엄마와 파고 있는 네게 물었다. 앤 장점이 뭐냐고?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편견이 없는 것 같아."

 

한 번 더 물었다. 앤이 늘 편견 때문에 피해를 겪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앤이 갖춘 장점이 아니라 환경이 만든 어쩔 수 없는 성향 아닐까?

"편견이 전혀 없어도 될 만큼 가진 사람도 편견이 없지는 않아. 편견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가해자일 수 있다는 편견이 또 생기기도 하고."

생각할수록 앤이 갖춘 장점 맞다. 잠깐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구나.

"아빠가 생각하는 앤 장점은 뭐야?"

 

글쎄, 어떤 상황에서든 가장 좋은 답을 찾아내는 낙천성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 난제

늘 좋은 답을 내놓고 싶은 마음이야 차고 넘친다. 알지? 하지만 오늘은 어렵더라.

"간혹 신체 특정 부위를 주시하는 불편한 시선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모르겠어."

오늘은 어렵더라.



# 제주 귤

제주 출장을 다녀온 엄마가 상자에서 귤을 꺼내며 말했다.

"이거 엄마가 직접 제주에서 힘들게 들고 온 거야."

 

물론 고생했고 잘했지. 가만 생각하니 아빠 공도 그냥 넘길 수 없겠더라.

"제주에서 힘들게 귤을 들고 온 엄마를 공항에서 들고 온 사람은 누굴까?"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보던 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지.

 

"내가 잘못했어."



# 인문학

"인문학이 뭔지 모르겠어."

이런 질문에 이미 준비해 둔 답이 있다는 게 바로 인문학적 소양 아니겠니.

"내 안을 성찰하고 내 밖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 아닐까."
"오, 그럴듯한데."

그게 얼마나 큰 감탄인지 잘 안다.



# 3초

"예지야, 씻어라."
"아니 진짜 거짓말 아니고 내가 딱 지금 씻으려고 준비하는 중인데 엄마는 진짜."

발을 동동거리면서 말하는 게 더 우습더라. 어디 씻는 것뿐이겠니. 기상, 공부, 등교, 식사 등 모든 일상이 그렇지. 어쩌면 네가 딱 하기 직전에 맞춰서 시키는지. 스스로 잘하는 아이가 마치 뭐든 시켜서 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많이 억울하겠다.

세상 모든 엄마들은 뭘 시키기 전에 3초만 기다려야 할 것이야. 물론 3초 뒤에도 '딱 하려는 순간'이라는 것은 변함없다는데 네 저금통을 거마.



# 싸움 구경

수학여행 대신 진행하는 체험학습이 설레나 보구나. 학교에서 차가 출발하기 전에 남긴 잘 다녀오겠다는 메시지가 너답지 않았지만 좋았다. 하지만 저녁에 너에게 들은 사건은 전혀 예상 밖이어서 조금 놀랐다.

"차에서 내리는데 우리 반 남자애가 다른 남자애 얼굴을 주먹으로 네 대나 때렸어. 맞은 애는 코피 나고."

처음 접하는 실전에 얼마나 놀랐니. 게다가 피까지 보고. 느닷없이 눈앞에 펼쳐진 야만과 폭력에 상처받았을 영혼이 걱정됐다. 괜찮았니?

"그런데 아빠, 영화에서 사람 때릴 때 나오는 퍽퍽 효과음이 전혀 근거 없는 게 아니었어. 진짜 그런 소리가 나더라고."

괜찮았구나. 맞은 친구도 때린 친구도 어서 회복하기를 빈다. 몸도 마음도 관계도.



# 기적

"연극영화과 공부도 재밌을 것 같아요. 연기는 자신 없는데 연출은 괜찮을 듯해서…"

느닷없이 툭 던진 말에 놀랐다. 아울러 네 삶과 고민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모처럼 함께 나간 시내에서 영화나 한 편 볼까 했더니 내용도 시간도 마뜩잖아 조금 더 걸었고, 마치 대본처럼 연극표를 파는 사람을 거리에서 만났다. 함께 그리고 즐겁게 연극을 봐서 좋았다. 이런 일상과 순간을 늘 기적이라고 생각한단다.



# 지옥

"엄마랑 아직 <지옥> 안 봤다. 너 시험 끝나면 같이 보려고."
"진짜?"
"엄마가 먼저 보자고 했는데 아빠가 그럴 수 없다며 예지 시험 끝나면 함께 보는 게 좋겠다고 했지."

살짝 비웃는 표정에서 부녀 사이 탄탄한 신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네 짐작과 전혀 어긋남 없이 사실은 이렇단다.

부 "우리 지옥 볼까?"
모 "예지 시험 기간인데 다음에 같이 보지."
부 "먼저 보고 안 본 척하면 되잖아."
모 "그건 아니지."



# 기말고사

내일부터 기말고사라고? 시험 준비가 생각대로 잘 진행되지 않는 듯 보여 물었다.

"혹시 이번 시험 목표가 있어?"
"한 과목 정도는 100점을 받았으면 좋겠고 80점 밑으로 내려가는 과목은 없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잘 안 될 것 같아."
"아빠도 늘 세상에서 제일 좋은 뉴스를 만들고 싶은 목표가 있어. 그런데 잘 된 적이 없거든. 원래 목표가 잘 안 되는 걸 하려는 거야. 어차피 잘 되는 것을 뭐한다고 목표로 삼겠어."

한층 표정이 밝아지더구나. 보호자로서 또 해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단다.



# 엄마만 알아

엘비스 프레슬리 닮은꼴 대회에 직접 참가한 엘비스가 3등 했다는 이야기에 한참 웃던 네가 이렇게 말하더구나.

"사람은 누군가를 직접 보면 과장하거나 축소해서 인식하는 것 같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두 박자 정도 쉬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신기하네."
"그러게."

옆에서 듣던 엄마가 깔깔 웃은 이유를 짐작하겠니? 엄마만 알아들었을 괄호 안 내용은 이렇단다.

"(네가 그런 통찰을 하다니) 신기하네."
"그러게. (아빠도 있는 그대로 사람을 인식하지 않는 게 신기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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