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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to ye-ji

2022년 열여섯 살

# 북유럽 감수성

오늘부터 방학이라니 부럽구나.

"네 방학 만 원에 하루씩 사면 안 될까?"
"싫어."
"왜? 만 원이 적어?"
"그게 아니라 무슨 휴식을 돈으로 계산하려고 해?"

괜히 북유럽 감수성 같아서 마음에 들었단다.



# 코로나19

열이 38도를 넘어 39도를 넘보기에 깜짝 놀랐다. 드디어 올 게 왔나 싶더라. 그런 시절이지 않니. 가까운 호흡기 클리닉 병원을 가면서도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거기 서세요."

2미터 정도 거리에서 의사 선생님이 지시했다. 낯선 원거리(?) 진료가 괜히 걱정을 더 키우더구나. 몇 가지 절차를 거쳐 신속 검사를 진행했다. 2분 먼저 음성 결과를 받은 네 표정이 평화롭더라. 열 없는 아빠 역시 음성으로 나왔다. 결과를 확인하자 의사 선생님도 가까이 오라더구나.

"정말 다행이네요. 요즘은 증상이 있으면 거의 확진이더라고요. 학생 장하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으면 장한 세상이다. 서둘러 2차 접종을 마친 딸과 3차 접종까지 마친 아빠가 한 번 위기를 넘긴 만큼 '우수 백신 사례'로 기록을 남기는 게 좋겠다.



# 변덕

아이스크림 한 통을 혼자 다 먹었더구나. 이틀에 걸쳐서 혼자!

"먹다가 아빠 생각났다고 거짓말 해 줘."
"싫어. 거짓말을 왜 해."

그냥 한마디 해 주면 될 것을 끝까지 버티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진솔한 삶을 살았더냐?

"거짓말 해 줘. 그 정도도 못 해? 섭섭해."
"아빠 생각났다고 거짓말 하면…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고 뭐라 할 거잖아."

아주 쉽게 납득됐다. 아빠를 너무 잘 아는구나. 좋은 딸이다.



# 배신

"아빠, <파워 오브 도그>라는 영화 봤어?"
"아니, 아빠와 엄마는 예지만 빼놓고 무슨 영화를 보지는 않지. 주말에 같이 볼까?"

네가 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이 나란히 앉아 좋은 영화를 찾아 본다는 것은 늘 소중하고 고마운 시간이었다.

"나는 봤는데."

그러니까 오늘까지.



# 하지만꽃

동네 여기저기 숨을 틔운 벚꽃이 어여쁘더라. 며칠 뒤면 꽃잎이 흐드러져 흩날리겠구나. 나란히 걸어 더 좋았다.

"아빠, 우리는 '하지만꽃'이라고 부르기도 해."
"하지만꽃? 화려하게 피었다. 하지만 곧 지는구나. 이런 뜻?"
"아니 벚(but)꽃."

차라리 'but flower'라고 할 것이지. 한 번 웃어 줬다만 다음에 '아재 개그' 어쩌고 저쩌고 하면 확!



# 마침표

"아빠가 보낸 톡은 다른 사람과 확실한 차이가 있어."

부끄럽게 문장이 간결하다거나, 짧은 메시지에 깊은 통찰을 담았다거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깊숙한 곳까지 와닿는다거나, 단어마다 듬뿍 사랑이 묻어난다거나 이런 말은 제발 좀 말았으면 좋겠다. 겸손한 삶에 방해되거든.

"아빠만 마침표 찍어. 내 주변에 톡 하면서 마침표 찍는 사람 아빠뿐이야."

그래, 직업병이다.

 

# 혐오

"아빠, 혐오는 왜 할까?"

이런 질문을 하는 중3 여학생 아빠라는 게 너무 뿌듯하다. 이런 질문에 검색 없이 바로 답할 수 있는 40대 남성 딸이라는 게 너에게도 자랑이었으면 좋겠구나.

 

"혐오는 내 모자람을 가장 효율적으로 감출 수 있는 수단이거든."



# 마트에서

우리 앞으로 마트 직원이 빈 종이상자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카트를 밀며 다가오던 중년 남성은 그 직원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면서 종이 상자를 건드렸다. 세 상자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아빠는 반사적으로 지나가는 아저씨를 먼저 돌아봤다. 당연히 충돌을 인식한 그는 뒤를 힐끔 쳐다봤으나 아빠와 눈이 마주치기 직전 반박자 빠르게 고개를 돌리고 멀어졌다.

다시 앞을 보니 너는 벌써 두 상자를 주워서 수레에 얹더구나. 나머지 한 상자를 수레에 올리니 상황을 늦게 알아차린 직원이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학생, 고마워요. 참 예쁘네."
"아니에요."

그 상황에서 아빠는 기껏 책임 소재나 따지겠다고 반사적으로 범인(?)을 시선으로 쫓았는데, 너는 허리를 굽혀 문제부터 해결하는구나. 네 세상이 아빠 세상보다 더 낫다.



# 선택

"저녁에 뭐 먹을까?"
"뭐 있는데?"

세 가지를 생각했단다. 재료 있고 손 갈 게 별로 없는 볶음밥, 재료는 있지만 품이 드는 파스타, 재료도 없고 품은 들여야 하는 떡볶이. 세 가지 보기를 제시하고 속으로 거듭 외쳤다. 볶음밥! 볶음밥! 볶음밥!

"아빠, 오랜만에 떡볶이 먹을까?"
"그래, 마트 가자."

그럴 줄 알았다.



# 외식 대신 라면

거짓말하는 날에 거짓말처럼 태어난 엄마가 올해 초 거짓말처럼 서울 발령을 받는 바람에 엄마 없는 엄마 생일을 맞게 됐다. 딱히 받고 싶은 게 없다며 머쓱하게 현금을 원하는 엄마에게 원하는 금액을 물었더니 겨우?

네가 다섯 살 때 '로보카 폴리' 세트(4개) 중 하나만 갖고 싶다며 소심하게 부탁했잖아. 주저 없이 네 개 모두 사줬던 아빠 배포를 기억하니? 좀처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던 네 표정을 아직 기억한다. 너는 엄마 과거고 엄마는 네 미래 아니겠니. 딱 네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송금했다. 그래 봤자 얼마 안 되는 게 애초 엄마 배려고 아빠 한계지만.

"아빠, 오늘 라면 진짜 맛있어요."

그래, 주말 외식 대신 라면을 끓인 이유다.



# 티셔츠

"아빠, 1000원이나 5000원 있어요?"

 

1000만 원이나 5억 원이 없지 그 정도야 지갑에 꽂혀 있다. 네 아빠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조금만 더 존중해다오. 그런데 왜?

"반에서 티셔츠를 맞추기로 했어요."
"5000원으로 돼? 티셔츠가 얼마인데?"
"1만 5000원인데 1만 원은 있어요."

 

빌어먹을 사회적 지위와 명성 탓에 1만 원을 더 주지 않을 수 없었단다.

"괜찮은데... 아빠, 고맙습니다."

애써 티 내지 않으려 해도 삐져나오는 기쁜 표정, 절실할 때 튀어나오는 높임말 속에 담긴 진심. 그 앞에서 또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엄마 유전자일 텐데 기특하게 잘 닮았구나.



# 좋아할 거면서

중3 첫 시험이 생각만큼 풀리지 않았는지 표정이 어둡더구나. 결과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과정에 매력을 느끼면 좋겠다는 말을 오늘은 꼭 해야겠다 싶었다. 결과 때문에 과정이 싫어지는 삶은 한없이 척박하거든.

"누구에게나 삶에서 정해진 결과는 죽음이야. 결국은 죽기 때문에 그 과정인 삶이 싫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어. 결과는 그냥 받아들이되 그 과정이 거듭할수록 즐거워야 삶이 매력적이지. 결과에 집착하다가 과정마저 싫어지는 게 가장 나빠. 점수는 그냥 받아들여. 엄마, 아빠는 평생 결과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은 있으니까. 대신 결과 때문에 과정 자체가 싫어지는 일만 없으면 돼."

한결 밝아지는 표정에서 아빠가 또 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 나중에 훌륭한 사람 돼서 인터뷰 같은 거 하면 이런 가르침을 준 아빠에게 고맙다 같은 말 하지 마."
"왜?"
"많이 부끄러울 것 같아서."
"좋아할 거면서."

잘 아는구나.



# 어버이날

고운 편지지에 꾹꾹 눌러 담은 마음 잘 받았다. 고르고 고른 단어가 애틋하더라. 아빠가 두 배 노력한 덕에 힘든 시기를 잘 넘긴다는 '객관적' 서술도 탁월했다. 내용도 좋았지만 마지막 인사는 읽을수록 묵직하구나.

"진심을 담아, 좀 더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은 딸 올림."



# 다이어트

2주 전부터 먹는 양이 줄어 마음이 쓰이더라. 가끔 끼니를 거르기도 하더구나. 많이 먹었다, 배고프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치킨을 2/3 정도 남기는 사태를 접하고서야 경고등이 들어왔다.

"더 안 먹어? 진짜 괜찮아?"
"괜찮아요. 많이 먹었어요."

 

다음 날 체육복이 아닌 깔끔한 일상복을 걸친 네 모습이 의아했다. 묻기도 전에 먼저 답하더구나.

"오늘 졸업앨범에 들어갈 사진 찍어요."

 

최근 식습관 관련 의문을 풀 단서를 포착했으나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참 예쁘다.



# 감동

결혼 16주년을 맞아 부모 장점을 기어이 실토하라고 강요했다.

"엄마와 아빠는 결은 비슷한데, 엄마는 내가 뭘 해도 괜찮다고 하고 아빠는 내가 더 좋은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늘 묻고."

 

생각보다 깊고 더 깊은 답에 엄마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단다.

 

"여보, 나 울어도 돼?"
"아니."

 

겨우 참았단다.



# 현장학습

"아빠, 현장 학습이 예정돼 있는데 영화 두 편 보는 거야."
"노는 거네."
"그러면 현장학습이 노는 거지."
"노는 거야?"
"노는 거지. 현장학습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노는 거지."
"맞잖아."
"그럼."

같은 생각이어서 좋았단다.



# 포옹

앞에 먼저 선 차에서 내린 친구가 너를 보자마자 양팔을 활짝 펼쳤고, 너 역시 주저 없이 양팔을 벌려 다가서더니 서로 껴안고 등을 두드리더구나. 곧 몸을 돌려 같은 방향으로 걷는 뒷모습이 그저 환했다. 친구끼리 당연하다고?

늘 하는 말이지만 당연한 게 당연하게 되는 게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더라.



# 패션

손톱을 까만색으로 칠했네. 도발적이면서 매력 있다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이렇게 물었다.

"다쳤어? 멍들었네. 손가락 10개 모두."

 

너는 그런 질문과 표현 자체가 참 재밌지만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애매하고, 그래도 그런 관심이 고맙다는 마음을 둘러서 이렇게 표현하더구나.

"패션. 모르겠어?"

 

즐거운 대화였다.



# 에어컨

“퇴근하고 집에 오니까 완전 시원하더라. 밖이 너무 더워서 죽는 줄 알았는데. 역시 예지 센스 끝내주네.”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는 모습이 웃겼다.

 

“언제쯤 나갔어?”
“3시 쯤?”

 

5시간 정도 빈집에서 에어컨이 돌았구나.

 

“역시 그 정도 미리 틀어놓으니까 집에 들어오자 마자 쾌적하구나. 훌륭해.”
“아빠, 내가 잘못했어.”

 

배시시 웃는 모습이 예뻤다. 한 시간 전, 에어컨 틀어놓고 나갔다며 짜증내는 아빠에게 엄마가 그러더라.

 

“다른 속 안 썩이는 거 생각하면 그 정도야 뭐. 자기는 더 심한데.”

 

딸에게 애정이 넘쳐 남편을 깎아내리는 엄마 만행을 감성은 용납하지 않았으나 이성으로 부정할 수는 없었단다.



# 와이파이

이발까지 했는데 삐죽 튀어나온 흰 머리카락 한 올이 엄마 눈에 거슬렸나 보다. 몇 번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뽑아 주고 싶다더구나. 시선이 고정된 부위를 손으로 가리며 경고했다.

 

"절대 건드리지 마."
"왜?"
"와이파이거든."

 

빵 터지는 너를 보고 아빠가 또 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밀번호가 뭐냐고 되묻는 감각 또한 훌륭했다.



# 대문자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영어 대문자로만 돼 있으면 짜증나."
"왜?"
"입력할 때마다 쉬프트를 눌러야 되잖아."
"아빠, 쉬프트를 두 번 연속 누르면 계속 대문자 입력 돼."
"진짜?"
"아니, 아빠는 나보다 아이폰을 훨씬 오래 썼으면서 그것도 몰라?"
"응, 너보다 폰을 훨씬 오래 썼지만 대문자는 훨씬 적게 썼을 걸."

 

너와 차원이 다른 요금제로 와이파이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위엄을 보인 듯해 뿌듯했다.



# 밴드 멤버

밴드에서 건반을 맡은 친구가 연습에 빠졌다고? 1년에 몇 번 하지도 않는 귀한(?) 연습을 빠졌다니 괘씸했다.

 

“확 자르지. 그대로 뒀어?”
“그럴 것까지는 없고. 그 친구가 피아노 전국 대회를 나가느라 이번 연습에 빠졌는데 대상 탔어.”

 

대상이라…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훌륭한 멤버구나.”
“그렇지?”
“그렇지.”

 

인정할 것은 빨리 인정하는 편이다.



# 물리 현상

네 신발 한쪽이 아빠 신발 한쪽 위로 샌드위치처럼 포개져 있어 신기했다. 일부러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지만, 애써 그렇게 할 이유는 더 찾기 어려웠다. 어쨌든 세상에는 포개진 신발보다 중요한 일이 많기에 금세 잊었다.


오른발 안쪽으로 왼쪽 신발 뒤꿈치를 고정해 왼발을 빼고, 신발에서 벗어난 왼발로 오른쪽 신발 뒤꿈치를 다시 고정해 오른발을 빼는 것까지는 일반적인 신발 벗기와 다를 게 없었다.

 

왼발 먼저 거실로 들어가는데 오른쪽 발에 신발이 반쯤 걸려 있더구나. 오른발을 뒤로 들어 공중에서 탈탈 터니 쏙 빠져나온 신발이 수직으로 코부터 바닥에 떨어져 튀어서 아빠 신발 위로 포개지더라. 샌드위치처럼.

 

그래, 평범한 물리적 현상이었어!



# 화답

외출하는 길에 재활용품을 분리하는데 어느새 다가와 함께 나누는 모습이 예뻤다. 나누는 솜씨는 아빠보다 훨씬 깔끔하고 단정하더구나. 분리수거장을 나오면서 나란히 옆에서 걷는 네 어깨에 일부러 툭 부딪히며 말했다.


“고마워.”

 

툭 튕겨나는 너는 킥킥거리더구나. 바로 도움닫기를 하며 높게 뛰면서 아빠 어깨에 있는 힘껏 부딪히는 기세에 보도 밖으로 튕겨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대사도 좋았단다.

 

“천만에.”



# 중국어

“아빠, 중국에서 중국어 할 줄 안다고 하면 큰일 난데.”
“왜?”
“완전 빨리 말한데.”
생각할수록 그것 만큼 큰일이 없겠다 싶더라.



# 옛다

시험을 치면 늘 점수를 묻는 친구가 영 거슬렸나 보구나. 자기 점수가 나으면 은근히 깎아내리 듯 던지는 한마디가 더 자극적이더라. 꽤 속상했겠다.

 

“그냥 자기 점수 자기만 알면 되지 왜 그렇게 묻고 다니는지 모르겠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과 비교해야만 자기 존재 가치와 행복을 겨우 짐작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어른들 중에도 말이다. 그 친구는 남보다 우위에 있어야 자식이 잘났다고 안심하는 부모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서 성취와 행복 기준을 자신에게서 찾는 네 태도가 참 마음에 든다.

 

“가르쳐 줘. 내 점수 때문에 네가 행복하다면 옛다!”

 

뭔가 답을 얻었을 때 살짝 반짝이는 네 표정이 늘 마음에 든다. 그 표정 때문에 언제나 더 좋은 말을 뒤지고 뒤질 수밖에 없더라.



# 불매운동

SPC 이야기를 알고 있더구나.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해서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아는 만큼만 얘기했다.

 

"파리바게트 안 가도 괜찮아?"
"응, 엄마가 아는 다른 빵집도 많은데."
"그래, 지나치게 많이 알지. 베라는?"
"다른 아이스크림도 많아."
"던킨은?"
"도너츠 별로 안 좋아해."
"다른 목록 중에 애용하는 거 있어?"
"요즘 자주 가는 커피숍이 있는데 이 목록에는 없네."

 

불매운동이 긴축 재정으로 이어지지는 않겠구나. 대체제를 많이 알고 있어 너에게는 참 다행이다.



# 표현하는 용기

학교에서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적당히 대응하지 못한 경험을 얘기해 줘 고마웠다. 이 문제는 좋은 대응을 말하기보다 좋은 대응을 하기 어려운 이유를 고민하는 게 마땅하다 싶었다. 

 

"고백하는데 아빠도 어렸을 때는 물론 지금도 어떤 상황에 맞는 의사 표현을 제대로 못하거나 피하는 경우가 많아. 그게 사실 너무 어렵거든. 그냥 지나치는 게 속 편하지. 그거는 인정.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하는 훈련은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대응을 잘하라는 게 아니라 잘하기 너무 어려우니 훈련은 필요하다는 것, 그 연습에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이거지."

 

뭔가 답을 얻었을 때 반짝거리는 표정은 언제나 마음에 든다. 이어 야물딱지게 할 말 다 하고 살았을 것 같은 엄마가 2교시를 시작하더구나. 중고생일 때 자기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상황, 분위기, 감정 등을 풀어놓으며 쉽지 않겠지만 조금씩 노력했으면 좋겠다는 응원까지… 쫌 하더라.

 

어쨌든 쉽지 않겠지만 힘 내자!



# 절대음감

"절대음감인 친구들은 이런 소리만 들어도 바로 음이 떠오른다 하더라고."

 

그러면서 식탁을 살짝 두드리더구나.

 

"솔 아니야?"
"뭐가?"
"방금 식탁에서 난 소리."
"아빠, 아니야."
"뭐가? 솔 아니야?"
"아빠 절대음감 아니야. 그만해."

 

혹시나 해서 시도해봤다. 냉정하고 단호한 평가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 첫눈

엄마가 서울에서 올해 처음 본 눈 소식을 전하더구나. 아빠가 되물었다.

 

"눈? 그거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가루 같은 거 말하는 거야? 책이나 영화에서 본 것 같은데."

 

엄마는 깔깔 넘어가더라. 전화를 끊고 정색하며 너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눈이라는 게 진짜 있기는 있는 거야?"
"아빠, 그 눈이라는 거 팥빙수 만들 때 들어가는 거잖아. 하얀 거."

 

능청스러운 표정이 무척 마음에 들었단다.



# 필체

"아빠 글씨 마음에 들어."
"그래, 난 진짜 마음에 안 드는데."
"나도 내 글씨 진짜 마음에 안 들어."
"그래? 난 예지 글씨 예쁘던데."

 


 

"바꿀까?"

 

동시에 튀어 나온 말에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늘 가진 것을 하찮게 여기고 갖지 못한 것은 탐하는구나. 그렇게라도 서로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다.



# 도움

방에서 슬그머니 나오더니 엄마를 찾더구나.

 

"엄마, 도움이 필요해요."
"엄마? 아빠는."
"괜찮아요."
"뭐야, 무시하는 거야?"

 

엄마와 함께 방에 들어가는 너에게 다시 물었다.

 

"아빠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뜨개질 잘해요?"

 

꾹 닫히는 방문을 보면서 조금도 아쉽거나 억울하지 않았단다.



# 자질

이태원 참사 사망자와 희생자 중 뭐가 맞느냐는 질문에 네 생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생자'가 맞다는 답에는 쉽게 동의했으나 그 답에 이르기까지 사고 과정에는 견해 차가 있더라.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어려웠다. 그럴 때는 가슴 깊은 곳을 뒤져 좋은 단어를 조심스럽게 고를 수밖에 없단다.


상대와 견해 차를 감지할 때 드러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먼저 보였다.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데 당장 반박하기 어려울 때는 그런 눈빛이었구나. 네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 아빠가 뭔가 오해하지 않았는지 지난 대화를 되짚는 말과 표정도 신통했다.

 

대화를 거듭하면서 다른 의견을 차근차근 되짚으며 처음 견해를 수정하는 모습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그 과정이 뭔지도 잘 모를뿐더러 대단한 것인지는 더욱 모르겠지만 아빠가 가장 감탄하는 네 자질이란다.

 

 




# 에필로그

딸 이야기가 한동안 뜸하자 안부를 묻는 이들이 많다.


이런 날이 올 줄 진작 알았는데 관찰자(?)로서 전할 내용이 이제 별로 없다. 아이는 이제 관찰되지 않을 만큼 자랐고 성숙하며 사적인 주체가 된 듯하다. 6살 때부터 시작한 기록이 꽤 된다. 모아서 적당한 시기에 통째로 넘길 생각이다.

 

2023년 3월 5일은 17살 딸이 맞은 16번째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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